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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길] 평촌 냇가길

2020년 02월 04일(화) 11:10 [온양신문]

 

↑↑ ▲유만근(숲해설가)

ⓒ 온양신문

‘나는 을묘년(1555)에 李氏네로 장가를 든 뒤부터 온양의 시골집을 드나들었다. 그때마다 집 주변으로 10리도 채 되지 않은 곳에 산림과 계곡과 들판의 뛰어난 경치가 갖추어져 있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집의 서남쪽 땅은 산들이 서로 어우러져 길게 이어졌고, 계곡 가까이로 우뚝 솟아 있고, 들판을 멀리까지 내려다볼 수 있었다.’

위 글은 조선의 선비 최립이 외암마을에 살던 이사종의 사위가 되어 이곳을 오가며 열승정(閱勝亭, 마을인근 정자) 주변의 경관을 묘사한 글로서, 널따란 평촌 들판에 대한 느꺼움을 표현한 듯하다.

평촌들은 산지가 대부분인 송악면 지역에서 가장 넓은 들이다. 이 들판을 온양천이 그림처럼 휘감아 돈다. 송악의 수많은 산과 들에 떨어진 빗물은 모두 이곳에 모여 곡교천을 거쳐 서해바다로 향한다. 주민들은 그냥 ‘평촌 냇가’라고 한다.

송악의 지형은 광덕산·봉수산·황산·월라산·설화산이 의기투합한 듯, 양 손을 넓게 벌려 맞잡아 경계선을 만듦으로써, 분지형태의 땅을 만들었다. 천혜의 산중호수를 만들려고 했던가 보다. 그런데 북쪽의 월라산과 설화산이 맞잡을 듯하던 손을 불과 수백 미터 남겨두고 슬그머니 내려놓으면서 물길을 터줬다. 대신, 능선·지선(支線)·작은 봉우리·골짜기 등을 무수히 만들어 별천지를 이루어 놓았다.

산이 빼어나지는 않으나 넓고 깊다. 물도 맑다. 사람들은 이 물을 모아서 1961년, 궁평저수지를 만들었다. 저수지 주변숲 또한 무성하고 경관도 수려하다. 산그리메가 단골손님이고, 달과 바람과 안개가 수시로 머물다 간다. 온갖 철새들도 즐겨 찾는다. 이 물이 온양천을 이루며 온양시내의 상수원이 되었고, 지금도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관리되고 있다.

평촌 냇가길은 설화산과 월라산이 손잡기를 멈춘 바로 그 지점부터다. 청솔아파트를 지나 외암1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냇물을 거슬러 100m쯤 올라가면 월구리마을 입구이다. 여기서부터 물길은 송악 제1의 평촌들을 싸고 돌며 저수지 대보둑(大洑)까지 2km남짓 이어진다.

월구리 초입에는 제법 큰 보(洑)가 있다. 물위로 겨울 철새들이 자맥질로 분주하다. 멀찍이 커다란 백로 한 놈이 제법 의젓(?)한 모습으로 응시하고 있다. 겨울가뭄이 계속되는데도 제법 물이 흐른다. 조그마한 자갈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가 옹알이소리처럼 정겹다. 흐르는 물 위로 달빛 쏟아지고 개구리 합창까지 어우러지는 밤이면, 홀로 이 길 걸을만 하겠다.

들판 서북쪽엔 월라산(月羅山)이 있다. 그 산기슭에 형성된 마을 이름이 월구리(月窟里)·다라미(달아미)이다. 이름이 모두 달과 연관된 점이 특이하다. 마을 앞 우뚝 솟은 설화산에 둥두렷이 보름달이라도 걸리면 누구든 시인이 될 것 같다.

넓은 들판 중천으로 끼룩거리며 날아가는 기러기 떼는 한폭의 동양화가 아닐까. 마을·산·들판의 전체적 분위기도 반달을 닮은 듯 둥그스름하다. 냇물 또한 들판을 커다란 반달 모양으로 싸고 흐른다.

월라산 정상 부근에 ‘병풍바위’라 부르는 널찍한 바위가 있다. 달이 뜨면 제일 먼저 반짝거린다고 한다. 1962년, 국가 슬로건이었던 ‘재건(再建)’이라는 구호를 써놓았는데, ‘달밤에도 선명하게 보였다’고 연로한 주민들은기억하고 있다. 지금은 나무가 우거져 바위가 좀 가려져 있다.

봇물이 흐르는 구역을 지나면 개울에는 물이 거의 없고, 갈대와 달뿌리 등이 온 개울가를 점령하고 있다. 저수지가 조성되기 전, 이 개천 물은 평촌들 농사의 젓줄이었다. ‘외겨보·차보·용보·중보·새보·월구리보·둑갑보’등 여러 개의 보를 막아 물을 활용하였기에 곳곳마다 수량이 많고 온갖 고기도 많았겠지만, 저수지물을 공급하는 인공수로가 생기면서 보는 거의 없어지고 농지정리로 논길이 반듯하게 되면서 생태계도 많이 바뀌었다.

산천도 변하여 월구리를 감싸던 산자락이 2006년에 ‘자동차전용도로’가 생기면서 허리가 잘렸고, 승주골 산자락에는 2002년 세워졌다가 2018년에 폐교된 서남대의 높다란 시멘트 건물이 장승처럼 무표정하다.

다행히 현재의 평촌들은 농약이나 화학비료조차 쓰지 않는 유기농단지로 변모하여 미꾸라지, 개구리 등이 서식하는 등 논생태계가 되살아났다. 봄이면 환상의 자운영꽃이 피고, 여름이면 녹색 세상이 아름답다.

황금들판이 펼쳐지면 메뚜기·풀무치·사마귀·방아깨비 등 온갖 곤충들이 뛰어다닌다. 가을걷이 때는 생산자와 소비자들이 어우러져 메뚜기 잡기·논생태체험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정월 대보름이면 흥겨운 농악과 함께 연날리기·제기차기·썰매타기·달집 태우기·떡메치기 등 다양한 민속놀이가 벌어진다.

마음을 숙연하게 하는 곳도 있다. 냇가길이 외암천과 합류되기 200m전쯤, 작은 돌을 쌓아 만든 보가 있고, 그곳 개울 건너에는 조그마한 공원 하나 보인다. 수당(修堂) 이남규 순절지이다.

이남규(1855-1907)는 을미사변 후 예산 대술로 낙향하여 있던 중, 홍주성 전투에 참여한 의병장 민종식을 숨겨주었다는 죄목으로 일제에 의해 옥고를 치렀다. 후에 다시 체포되어 압송 도중 끝까지 저항하다가 이곳 평촌 냇가에서 아들, 가노(家奴)와 함께 살해되었다.

월구리(평촌3리), 다라미(평촌1리) 마을 앞 냇가길을 지나면 이어서 복구미·홰쟁이(평촌2리) 마을과 앞 들판이 나타난다. 이 들판의 서북쪽을 승주골산이 포근히 감싸고 있다. 복구미는 ‘엎어진 거북이’처럼 생긴바위가 바위가 있었다고 하여 생긴 이름이지만, 그 바위는 20여년 전 마을길을 넓힐 때 묻혀버렸다.

복구미 마을 초입에는 4개의 화강암 돌기둥의 호위 속에 열녀비 하나 서있다. 원래 바로 옆 아름다웠던 동산(황새동산)에 있었는데 그곳이 택지로 개발되면서 이곳으로 옮겨놓았다. 비의 주인공은 이 마을 사람이 아닐까. 이 마을도 꽤 오래된 마을인가보다.

홰쟁이는 마을 앞 정자나무로 회화나무(홰나무)가 있었기에 생긴 이름이다. 그 나무는 흔적조차 없지만, 동네 안으로 들어가면 아름드리 회화나무 그루터기 몇 그루가 근래까지 있었고, 그 주변에는 기왓장 조각이 많이 널브러져 있다.

회화나무는 양반이 즐겨 심었다는 나무이고, 복구미 앞에 열녀비도 있는 것으로 보아 서려있는 이야기 하나 있을 법 하지만, 세월에 묻힌 것 같다. 1-2년 전까지만 해도 현 궁평리소수력발전소 옆 산기슭에 백 년은 실히 넘어 보이는 회화나무가 있었는데 누군가가 베어버렸고, 이제는 복구미 마을 초입에 서있는 100년 남짓한 나무가 유일하다.

이곳 마을 앞 냇가에는 60년대만 해도 다슬기가 많았고, 메기·가물치·뱀장어·붕어·피라미·빠가사리(동자개)·구구리(얼룩동사리)·모래무지 등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뱀장어가 많이 잡혔는데, 1979년 삽교천 방조제 축조 후로는 나타나지 않는다.

봄이면 들판에 뜸부기 울고 황새가 푸른 논배미 위를 가르며 날아다녔다. 냇가 둑에는 버드나무가 하늘거렸고 여인네의 빨래소리도 들렸다고 한다. 지금 보아도 둥그스름한 냇가길이 정겹기 그지없다.

평촌 냇가길은 저수지 대보둑이 가로막으면서 끝난다. 대보둑에 올라보니 지금까지 걸어온 넓은 들판과, 들판을 둘러싼 물길과 웅장한 설화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전형적인 시골 냇가길이다. 문득, 아쉬운 마음이 물밀 듯 밀려온다. ‘고향의 봄’ 노랫말처럼 ‘평촌 냇가에 수양버들이 춤추게 할 수는 없을까’ 하고.

둑이 길을 막지만 걸을 마음만 있으면 길은 이어진다. 대보둑 왼쪽 끝 무넘이를 건너는 ‘삼거2교’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 길이 보인다. 저수지 왼쪽 수변을 끼고 도는 ‘천년물결길’이다. 오붓한 숲길이 2km남짓 이어진다. 그리고 또 다른 길로…….

↑↑ <사진제공=유만근>

ⓒ 온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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