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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리한구 본보 대표이사> 선장 3·1운동탑과 무인멸왜운동 나타나지 않은 역사의 소중함 현실을 두가지로 구분해 보자. 표면 현실과 이면(裏面)현실이 있다. 이면현실이 표면화(表面化)하고 또 표면화하면서 흘러가는 것이 역사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표면현실만 보고 잘했느니 못했느니 하고 시시비비를 한다. 그러나 “뜻”이 깊은 사람은 이면현실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남보다 한발 앞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다할 것이다. 수많은 역사중 표현된 역사보다 나타나지 않은 역사도 많다. 나타나지 않은 역사를 발굴하기 위하여 정부나 보훈처는 국민에게 발굴을 요청하고 있는 실정이다. 일제치하에서 우리나라 독립을 위해 활동한 사례는 많으며 묻혀있는 사례도 많다. 3·1조선독립만세운동은 전국적으로 전개됐으며, 3·1독립운동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일본세력 높을 때 멸왜운동 전개 그러나 서기 1938년에 발생했던 소위 무인년(戊寅年) 멸왜(滅倭)사건은 3·1독립운동사건보다 몇배 더 큰사건이다. 서기 1938년이면 일본이 중국과 치열한 전쟁을 할 때며, 소위 동북아를 강점하고 나아가 대동아(大東亞)를 건설하겠다는 야심 만만한 때다. 일본은 1941년 12월 8일 드디어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소위 2차 세계대전(태평양전쟁)의 선전포고(宣戰布告)를 했다. 3년전인 1938년쯤에는 일본의 세력과 패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던 시기다. 이때의 우리 민족은 너나 할 것 없이 일본의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다된 때다. 누구하나 친일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때에 죽기를 각오하고 멸왜(滅倭)운동을 한 것이니 얼마나 장한 일이며, 3·1독립만세운동에 비할 수 없는 대단한 운동이였다. 이 운동에 참여했던 인사는 황해도, 강원도, 경기도,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북도 일부에서 있었으며 이북의 평안도, 함경도와 경상남도 등 친일 세력이 있는 곳은 참여하지 않았다. 이 사건이 터지자 검거선풍이 벌어지고 고문에 의해 죽은 사람이 속출했다. 일본은 한참 수행중인 중일전쟁에 차질이 빚어질까 우려해서 죄는 인정하고 죄인들을 재판없이 속방하니 일제는 정신적으로 패망하고 이 사실이 소문나지 못하도록 쉬쉬했으며 묻어두기에 광분했다. 그래서 아는 사람은 알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사건은 1938년 당시 각 신문에 보도됐으며 그 증거가 없이는 주장할 수 없는 일이며, 보훈처는 밝혀진 인사들에게 보훈하고 있다. 선장독립운동기념탑에 무인멸왜 제외는 알맹이 빠지는 꼴 지금 선장에서 세우고자 하는 독립운동 기념탑에서 무인년 멸왜사항이 배제되면 배일운동의 “핵”을 배제한 알맹이 없는 “탑”이며 전국 도처에 흔해빠진 것이 3·1운동비다. 뒤늦게 세우는 3·1운동 “탑”은 제 빛을 내지 못할 것이다. 함에도 불구하고 선장발전협의회에서는 멸왜사건을 배제하자고 일부사람들이 주장한다니 생각을 잘못한 것이라 하겠다. 이사람들이 그러한 말을 하게 된 것은 우선 주최측에서 역사를 인식 시키지 못한 잘못이 있으며 홍보하지 못한데서 있을 수 있다. 원천적인 잘못은 홍보와 주관적인 계도를 하지 못한 주최측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근접한 각 시군에서 수형당한 인사가 있어서 그곳 지방사람들이 우리 아산에서 거행하는 기념행사에 그들 지역 유지와 유족들이 많이 참여하도록 기회와 문호를 개방하여 해마다 성대히 봉행하는 기념식이 되도록 해야 할 것이다. 멸왜탑은 전국에서 제일먼저 세우는 것 멸왜탑은 전국에서 우리시가 제일 먼저 세우는 것이니 얼마나 장한 일이며, 타지방에서 부러워 할 것이다. 그분들도 독립운동자요 애국운동자니까 지역적 구별을 하는 것은 삼가하고 특히 종교적 배타의식을 버려야 진짜 종교인의 길을 가는 것이다. 애국은 구별없고 한정이 없기 때문에 그분들에 대한 예우도 한정해선 안된다. 그리고 주최(主催)와 주관(主管)의 개념을 혼동하니까 중구난방(衆口難防)이 된다. 간접 주관자가 주최측과 협의없이 임의로 형질변경을 할 경우 부당한 행위가 될 뿐만아니라 역사에 큰 누( )를 범하게 된다. 자칫 잘못하여 기념탑 건립의 의의(意義)를 훼손(毁損)할까 두렵다. 무인년 멸왜 운동을 하라고 지시하고 교도하신분은 이곳에서 가까운 예산군 덕산면 막동에서 사시던 춘암(春菴)박인호(朴寅浩)선생이시다. 춘암선생은 3·1만세운동 당시 자금책이였으며 48인의 한분으로 2년6개월간 옥고를 치르신 분이다. 우리지방도 그 분의 영향을 받었다고 믿고 있다. 무인멸왜 운동 주도는 박인호선생 또한 예산군에서는 예산군민의 날을 설정하고 우리시의 이순신장군을 받들듯이 춘암 박인호 선생을 받들자고 이상재 선생과 윤규상 선생 등 유지분들이 발의를 하고 있다 한다. 윤봉길 의사 역시 춘암의 지도를 받은 분이라고 밝혀졌으며, 김구 선생도 엄밀이 따지면 춘암의 제자였다고 할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역사의 진실에 친일계 역사 학자들의 소행으로 인하여 왜곡이 있었기 때문에 와전에서 와전을 거듭했다고 보여진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소소한 개인의 불필요한 고집으로 위대한 선열의 애국충정을 해롭게 하지 말자. 큰소리만 치지 말고 우리들의 현재 위치는 나라를 위하여 한 것이 있느냐? 없느냐? 잘 모르면서 아는체 하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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