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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사적으로 악감정 갖고 처단한 경우도

아산지역 부역혐의자 색출·처단한 가해자들

2018년 03월 26일(월) 09:43 [(주)온양신문사]

 

중리 민간인학상 유해발굴(4)

한국전쟁기에 학살 당하고 암매장 됐던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이 지난 2월 22일부터 현재 배방읍 중리에서 진행되고 있다. 이 작업은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이 진행하는 작업으로 아산시가 일부 재정을 지원하고 있어 특히 의미가 있다.
이에 온양신문은 이 발굴작업 및 한국전쟁기 아산 지역에서 전개된 민간인 학살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한국전쟁기 민간인학살 유해발굴 공동조사단’의 자료를 토대로 연재한다. <편집자註>


↑↑ ▲발굴유해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조사지도 계속 확대되고 있다.

ⓒ 온양신문


□ 사건 조사결과

신청사건에 대한 조사결과 아산지역 부역혐의 사건으로 희생된 사람은 최소 8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것은 진실규명대상자가 희생된 지역에 대한 조사결과일 뿐이며 진실규명이 신청되지 않은 지역은 통계에 포함되지 않았기 때문에 실제 아산지역 희생자 수는 훨씬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인 진술에 따르면 희생규모가 가장 컸던 배방면은 9.28수복 시기 최소 200여 명, 1.4후퇴 시기 300여 명이 희생됐다. 그 외 신창면 150여 명, 탕정면 90여 명, 그리고 염치면과 선장면에도 수십 명이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사람은, 진실규명 신청된 61명 중 59명과 신청하지는 않았지만 조사결과 희생자로 신원이 확인된 18명으로 총 77명이었다.

아산사건의 희생자는 크게 9.28수복 시기와 1.4후퇴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수복 시기에는 주로 부역혐의를 받았던 당사자들이 체포·살해됐으며 후퇴 시기에는 부역혐의자 뿐 아니라 그 가족들까지 함께 살해됐다.

희생자들의 성별 분포를 보면 남성 48명, 여성 28명이다. 이들 중 10세 미만 어린이가 14명(남아 6명, 여아 7명, 성별미상 1명) 포함됐다. 이와 같은 사실은 부역자 살해가 뚜렷한 혐의나 기준 없이 무차별적으로 진행됐음을 의미한다.

□ 가해자들

조사결과 아산부역혐의자들에 대한 학살 사건의 가해자(단체)들은 온양경찰서를 비롯해 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향토방위대), 태극동맹 등이었다.
나름의 사명감으로 공산치하 부역혐의자에 대한 색출 및 처단 등에 참여한 자들도 있겠지만 개중에는 개인적인 친소관계로, 뚜렷한 법적 근거도 없이 민간인을 자의적으로 학살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온양경찰서
조사결과 이 사건 관련, 지휘.명령권자는 온양경찰서장이었다. 당시 온양경찰서장은 조○○·오○○이었으며 이들은 충남경찰국장 김○○의 지휘를 받았다. 온양경찰서장의 지휘 하에 경찰은 주로 사찰계에서 부역자 문제를 처리했고 아산지역 각 읍·면치안대는 경찰의 지시를 받아 부역자를 체포·이송·처형했다.

치안대는 마을마다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대한청년단과 태극동맹, 의용경찰들로 구성됐다. 치안대는 경찰, 면사무소 등과 긴밀한 협조관계 속에서 부역자 체포와 처형을 감행했다.

당시 경찰 기록을 보면 ‘경찰이 진주 시까지 혼란된 관내 치안은 각 읍·면에서 자위대가 조직돼 공비소탕과 좌익악질분자 숙청에 희생적으로 활약을 하고 있었으나, 산간벽지에는 공비가 출몰해 식량 및 물품 약탈 등 양민을 괴롭혀오던 중 경찰 진주와 동시에 1950년 10월 4일 오후 5시경 치밀한 토벌작전을 전개해 광덕산 등지의 공비 및 악질부역자 389명을 소탕했다’고 적혀 있었다.

1950년 10월 11일에는 오○○ 경찰서장이 부임해 1951년 4월 25일까지 아산지역을 관할했다. 당시 온양경찰서에는 사찰경찰 이○○(내근) 외 10여 명, 수사경찰 임○○ 외 10여 명 등 경찰관 수는 의용경찰을 포함해 100여 명 정도 규모가 있었다. 또 각 지서 근무에는 주임 1명, 순경 2~4명 정도가 배치됐다.

지서에는 이미 1950년 9월 27일경 경찰 선발대가 들어갔는데 그 수는 각 지서마다 1인에 지나지 않았고 본서와의 통신은 10월 초, 본서가 복귀되면서 가능했다. 지서 인원 보충은 선발대 입성 한 달 후에야 이루어졌다.

부역자의 체포와 분류는 본서에서 파견 나온 사찰계 경찰과 해당 지서주임 및 지역우익단체장(국민회, 태극동맹, 대한청년단 등) 등의 협조 하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부역자 문제는 해당지역 지서에서 처리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지서 인력이 적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조사가 이루어지기 어려웠으며 이 가운데 억울하게 휩쓸려 죽은 사람이 적지 않았다.

배방면의 경우 1.4후퇴 시기 배방지서(지서주임 한○○, 순경 신○○)와 배방면사무소에 부역자 처형지침이 온양경찰서장으로부터 하달됐다.

신창면의 경우 1951년 1월 신창지서에서 부역혐의자들을 체포. 구금한 후 상부의 지시를 기다리던 중 지서주임 유○○은 의용경찰 오씨와 정씨를 시켜 창고에 구금돼 있던 부역자들을 임의로 총살시키기도 했다.

본서로 이송된 부역혐의자들은 사찰계에서 조사를 했는데 인력이 부족해 다른 부서의 경찰들도 동원됐다. 조사과정에서 구타와 전기고문이 따랐으며 조서가 작성되면 부역혐의자는 등급에 따라 분류됐다. 처형등급으로 분류되면 온양경찰서장 오○○의 결재를 거쳐 집행됐다. 이와 같은 처형은 아산지역에서 1951년 말까지 계속됐다.

▲치안대(대한청년단·청년방위대·향토방위대)

아산지역 조사결과 민간인 희생의 주요 가해자인 치안대를 구성한 것은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였다. 대한청년단은 1948년 12월 19일 결성돼 한국전쟁 시기인 9.28수복 이후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까지 체포하고 처형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인민군 점령기 직전 온양읍에는 청년방위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수복 후 복귀한 방위대원들이 대한청년단과 함께 각 마을의 부역혐의자 체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부역혐의자의 체포는 주로 치안대와 주민의 밀고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체포된 자들은 치안대에 의해 살해되기도 했고 해당 지서에서 구금·분류된 후 살해되거나 온양경찰서로 이송돼 살해되기도 했다.

온양읍에서는 대한청년단원 김○○ 등이 부역혐의자를 체포, 청년단 사무실에 감금. 고문했고, 배방면에서는 대한청년단원 정○○가 부역혐의자를 색출.체포하는 데 앞장섰다.

탕정면의 경우 청년방위대 1소대장 장○○, 2소대장 김○○가 치안대를 지휘했고 대한청년단(단장 이○○, 단원 장○○, 원씨, 한씨) 또한 탕정지서(주임 맹씨)와 공모해 부역혐의자를 체포·살해했으며, 염치면에서는 대한청년단원 홍○○·홍○○ 형제가 주동이 돼 대동리 주민들을 부역혐의자와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조사과정도 없이 살해했다.

이와 함께 향토방위대도 부역자 살해에 가담했다. 특히 배방지서주임 한○○는 향토방위대장 한○○과 공모해 대한청년단(경리부장 장○○, 단원 윤○○), 의용경찰(이○○)을 동원해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을 살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태극동맹

한국전쟁 전후 국가에서 조직한 청년방위대와 향토방위대 등 준군사조직 외에 9.28수복 이후 민간단체로서 치안활동을 한 것은 ‘태극동맹’이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태극 문양을 그린 완장을 두르거나 두건을 쓰고 다니며 부역자 체포에 적극 참여했다.

온양읍의 경우 인민군 점령기에 온양중학교 교사와 남녀학생들이 지하운동단체인 ‘태극동맹’을 조직해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태극동맹은 좌익 측의 정보를 탐지해 우익 측에 제공하고 비밀리에 전황에 대한 방송을 청취하면서 시국의 변화에 대비했다. 이후 수복 시기에는 부역혐의자를 체포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선장면에서는 ‘태극동맹’이 면소재지 군덕리에서 조직돼 단장 정○○ 이하 단원들이 선장면 일대의 부역혐의자 및 그 가족들을 체포했다. 단원들은 주로 군덕리 청년들로서 인민군 점령기에 핍박받았던 우익인사의 아들이거나 마을에서 힘 쓰고 다녔던 사람들이었다.

탕정면에서는 1950년 9월 26일 좌익 측 사무가 중단됐던 날부터 ‘태극동맹’의 부역자 체포가 시작됐고, 염치면에서는 ‘태극청년단’이라는 이름으로 태극무늬 완장을 찬 청년들이 부역자를 체포하러 다녔다.

‘태극동맹’의 부역혐의자 체포.조사과정은 인접한 당진군 순성면 백석리의 ‘태극동맹’ 활동에서 구체적으로 확인됐다. 백석리 대한청년단원이었던 이○○은 인민군 점령기에 수십 명의 청년들을 결합해 ‘태극동맹’을 조직, 지하반공활동을 전개했으며 수복 후에는 부역자 체포활동을 했다.

이○○은 1950년 11월 초 대한청년단 본부로부터 순성면 백석리에 거주하는 이명규의 부역사실을 조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대한청년단 백석리 사무소였던 마을 창고에서 단원 수십 명과 함께 이명규를 취조 도중 살해했다. 이처럼 ‘태극동맹’은 대한청년단과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며 불법적으로 부역혐의자들을 처벌하고 있었다.

한편 전쟁 전 소방대원, 민보단, 국민회 청년단 등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인민군 점령기에 은신하거나 핍박을 받아오다가 수복 후 의용경찰이나 치안대라는 이름으로 부역혐의자 뿐 아니라 사적으로 악감정을 품은 대상자를 부역자로 처벌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선장면 치안대의 김○○, 안○○ 등은 종래부터 근방에서 힘 쓰는 자로 유명했다. 특히 김○○은 3형제가 선장면, 신창면 등지를 주름잡으며 부역혐의를 이유로 많은 사람을 살해했다.

↑↑ ▲여성으로 추정되는 유해와 함께 발굴된 가락지

ⓒ 온양신문


↑↑ ▲아직 금광 입구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이미 발굴된 유해들이 계속 쌓이고 있다.

ⓒ 온양신문


↑↑ ▲희생 여성의 모발과 비녀.

ⓒ 온양신문

임재룡 기자  skyblue626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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