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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동맹 마지막 생존자 이한영선생 가창대 위장, 요인 보호활동 등 전개 장충단추모제가 지난 9월 26일 온양중학교 옆 동산에서 강희복 아산시장과 김상남 아산시의회의장, 아산교육청 최영락 교육장 등 관내 기관·단체장을 비롯한 유족과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히 거행됐다. 장충단추모제는 6.25사변 당시 공산당에 대항하다 산화한 태극동맹단 단원들을 추모하는 행사로서, 매년 9월 26일 거행돼 왔다. 태극동맹단은 6.25사변 당시 우리고장에서 조직된 학생반공단체로서 최초 조직 당시 이한영(남 6학년), 현종완(남), 박노영(남), 오세기(남), 양광석(남 학살), 이택윤(여 학살), 이영환(여 학살), 권길옥(여 학살), 김온경(여 학살) 등 9명이며 혈서로 맹세하고 반공투쟁 활약을 펼쳤다. 이들 단원중 현재까지 생존자는 이한영씨와 박노영씨 두 분만이다. 기자는 당시 태극동맹단을 구성하고 학생들을 지휘하며 반공투쟁을 전개한 이한영(76세)씨를 만나 당시 단원들의 활동상황 등에 대하여 생생히 들어 보았다. 이한영 선생은 6.25사변 당시를 회상하며 “인민군이 온양시내로 진입한 것은 7월7일 이었다"고 말한다. “이후 인민군 인민위원회에서는 인민군 노래를 보급하기 위하여 가창대를 조직하도록 강요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온양중학교에는 음악부(밴드부)가 구성되어 있어 이 학생들이 그대로 가창대로 편제됐다.(이 음악부가 현재의 온양고 밴드부의 모태가 되어 오늘날 온양고 역사속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학생들은 겉으로는 인민군에 동조하는 척 가창대로 활동했지만 이는 태극동맹단으로 비밀리에 활동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 가창대로 등록된 덕에 이들 태극동맹단원들은 용화동 장골에 위치한 인민군 정치보위부(정보부 역할)에 수시로 드나들며 지역내는 물론이며 전선 상황까지도 손바닥 보듯이 미리 파악할 수 있었다 한다. 이들 정보를 바탕으로 태극동맹단이 펼친 주요활동사항으로는 인민재판에 회부되는 각 지역의 숙청대상인에게 미리 정보를 제공하여 피신토록하는데 활동의 중점을 두었다. 또한 전선의 사정을 전해들은 단원들은 국군이 진격할 때를 대비 태극기를 제작하는 등 치밀한 반공투쟁을 전개했다 . 이들의 주요활동은 두 달 남짓 계속되었다.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된 당시 9월15일 서쪽을 바라보면 함포사격소리가 메아리 쳐 들려오면서 동시 번쩍이는 불빛이 이곳 아산에서도 보였다 한다.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유엔군 탱크부대가 온양시내를 경유하여 예산방면(현재의 신창휴게소)까지 늘어섰을 무렵, 인민군들은 길가 야산에 매복하고 있었다 한다. 이를 모르던 주민과 학생들은 유엔군을 환영하기 위하여 저마다 태극기를 흔들며 거리로 뛰쳐나와 대대적인 환영식을 펼쳤다. 그러던중 유엔군이 갑자기 천안쪽으로 퇴각했다고 한다. 이한영 선생은 “이유를 알수가 없었다. 유엔군들과는 말도 통하지 않고, 무슨 이유에서였는지 지금도 모르겠다”며 고개를 흔들었다. 유엔군이 오던 길을 되돌리자, 곳곳에 숨어 있던 인민군들이 일제히 뛰쳐나와 거리에 나온 시민과 학생들을 향하여 발포, 몸서리 쳐지는 대량학살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당시 현장에서의 사망자수는 이한영 선생이 온양고 교사로 재직하던 56년도에 당시의 제적부를 정리하면서 200여명으로 추정했다) 당시의 환영식에 참여한 대다수의 남녀학생들은 온양중학생들이었으며 이들이 인민군들에 의해 학살당한 현장은 지금의 배미동과 신창면 사이로 거리마다 시체가 즐비했다고 이한영선생은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회고 했다. 같은 9월에 송악면에서는 온양중의 태극동맹단을 본딴 또다른 태극동맹단이 구성되었는데 불행히도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발각되어 모두 숙청되었다고 한다. 이 와중에 그 모태가 온양중 태극동맹단이란 사실까지 발각되어 단원들 전체가 일망타진 당할 위기에 처했었다고 한다. 이때 잡혀간 분들이 태극동맹단의 고문으로 있던 유진호, 임택규 교사이며 학생들로는 현종완(남), 양광석(남), 이택윤(여), 이영환(여), 권길옥(여), 김온경(여) 등이었다. 이들의 활동상황은 인민군 정치보위부에 의해 낱낱이 파헤쳐졌으며 끝내 현온양고등학교 음악실 뒤편 고구마 밭에서 9월26일 총살 당했다. 그러나 이들중 임택규교사와 현종완학생은 고구마밭의 고랑에 미리 몸을 숨기는 기지를 발휘해 죽음을 면하는 우여곡절을 격었다. 이후 서울이 수복되었다가 다시 1.4후퇴로 이어지는 등 밀고당기기를 반복하던 전쟁이 휴전으로 종지부를 찍을 무렵, 태극동맹단원은 생존자와 함께 50여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53년 당시 이들은 태극동맹단 특공대가 되어 무장한채 아산경찰서가 들어오기까지 한 달 여간 지역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다. 후에 경찰관에 치안을 인계하면서 태극동맹단이란 이름은 학도호국단으로 바뀌면서 학생 본연의 자세로 돌아갔다. 이와같은 반공단체들의 활약상은 우리지역 외에도 간혹 그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지만 불분명하다. 이에반해 우리지역 원로인 태극동맹단의 반공투쟁 활약상은 이한영선생 같은 생존자들에 의해 낱낱히 재조명되고 장충단추모제로 이어져 오고 있다. <임재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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