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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혼란기 틈타 일본 건달패가 온궁 강탈 김백선(향토문화연구가)
온양이 죽어가고 있다. 온천도 사양길이고 더불어 경제도 쇠퇴해 가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역사속에 묻히는 온양이 아닌가 위기감도 든다.
더욱 경제의 쇠퇴와 더불어 정신마저 혼미해지고 있다. 다시 찾아야 한다. 굳건하게 다시서는 온양, 살아나는 온양건설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온양의 정신이며 기둥이 된 ‘온궁’에 대해 알아야 한다.
그동안 왕의 온행에 대해서는 여러차례에 걸쳐 보도됐으나 일제에 의해 ‘침탈된 온궁’은 베일속에 묻혀 있었다.
부활하는 온양’을 위해 6회에 걸쳐 아픈 과거의 역사를 곱씹어 보고자 한다.
1. 일인이 강탈한 온궁 온궁은 조선왕조의 국운과 더불어 그 최후를 함께 했다.
일제 치하에서 서울의 궁궐은 이왕직소관이 되었으나, 온궁은 일본인 자본가의 사유 재산이 됐다.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하던 시기에 온궁의 구내에도 함락당 16간과 혜파정 14간을 신축하고, 아울러 퇴락한 신정비각 1간을 중건한 것으로 추정된다.
온양 온천의 욕탕은 본래부터 온궁에 소속된 것으로서 수탕직 1명과 탕직 30명의 정원을 두어 수호하고 관리하여 오던 것을 광무 초기에 이르러 정원을 대폭 감축하여 탕직 7명으로 하여금 온천을 수호하고, 아울러 탕세를 거두어 봉세관에게 바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온양군의 관속들이 농간을 부려 그들이 마음대로 차출한 탕직 1명이 온천탕을 관리하게 하고, 나머지 6명의 탕직은 관속중에서 차출하여 그들로 하여금 탕세를 징수하도록 하였다.
뿐만아니라 욕객으로부터 징수한 탕세중에서 매년 300량 내지 400량 정도만 떼어 봉세관에게 납부하고 그 나머지는 관속배들이 모두 착복하였다. 그러므로 탕직을 차출할 때마다 잡음과 알력이 그치지 않았다.
일찍이 아산군수를 역임한 바 있는 김갑순이 충청남도 봉세관으로서 온양 온천 탕직의 비리를 간파하고, 그 시정책을 탁지부에 건의함으로써 광무 6년(1902) 11월 22일 탁지부대신 임시서리 이용익이 내장원경으로 하여금 온양 군수 윤상덕에게 훈령을 내려, 온양군 관속배의 농간을 근절하고 아울러 온천 탕직 정원 7명을 영구직으로 정식 차출할 것이며, 탕직의 연례 세납액을 500량으로 타정하도록 하였다.
광무 8년(1904) 2월 8일 오후 4시경, 일본 해군은 인천 팔미도앞 바다에서 만주여순항으로 항해하고 있던 러시아 함대를 선제 기습 공격하여 해전 3시간만에 완전 격파하고, 다음 날에는 인천과 여순에서 동시에 개전하여, 2월 10일에 선전 포고를 하니, 이것이 러·전쟁의 시작이다.
이 시기에 일본군은 아산, 성환, 강화도, 인천등지에서 집결하여 러시아의 공격에 대비하였으며, 특히 10년 전의 청·일 전쟁 요충지였던 아산만 지역에는 일본군 1개 여단 병력을 배치하여 러시아군의 상륙·공격에 대비하여 경계를 강화하고 있었다.
따라서, 아산 지역 청·장년들은 일본군에 의한 강제 노역에 총동원되어 탄약을 비롯한 군수 물자 운반 작업에 종사하였으므로, 농촌에는 노약자와 부녀자만 남아 농사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7월 21일부터는 전시 비상 사태라는 구실을 붙여, 일본 정부에서 일방적으로 한반도의 치안을 일본 군대가 담당한다고 공포하였다.
이러한 러·일 전쟁(1904)의 혼란기를 호기로 삼아, 일본인 건달패들은 온궁이 운현궁 흥선대원군의 별장이라는 허위 사실을 날조하고 운현궁으로부터 온궁을 매수한 것처럼 위장하여 강탈하려고 하였다.
광천 자원이 풍부한 일본은 온천 문화가 발달하여 온천욕이 생활화되어 있었으며, 온천 경영의 경제적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우리 나라의 온천 문화는 매우 열악한 상태였고, 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웅장했던 온양 온천 온궁의 탕실 조차도 그 운영 실태가 지극히 부실하였다. 이러한 여건을 간파한 일본인 협잡배들은 친일 모리배와 결탁하여 온궁 강탈의 마수를 펴기 시작하였다.
러·일 전쟁의 혼란기를 틈타 한반도에 건너온 일본인 데구찌 야사브로와 아끼모또는 아산 지방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 여단장을 찾아가, 온양 온천 개발에 관한 계획을 설명하고 그에 따른 협조를 요청하였다.
아산만 지역의 치안권을 장악하고 있는 여단장의 쾌락을 받아낸 그들은 이름난 일본인 지질학자를 초빙하여 온천의 수원탐사를 의뢰한 결과, 가장 훌륭한 후보지로서 온궁 주변의 두곳을 알아내었다.
그리고, 그들은 온천 개발 예정 범위 내에 있는 전답에 대하여 평당 10전도 안 되는 헐값으로 매수하려고 흥정하였으나, 주민들이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자, 설화산에다 금광을 개발한다는 구실로 온양에 계속 체류하면서, 친일파 하수인, 일본 공사관의 정치 깡패, 일본인 유랑배등을 불러모아 이른바, ‘특공대’라는 폭력 조직을 만들었다.
1904년 8월 17일(음력 7월 4일), 정체 불명의 일본인 13명이 갑자기 온양 온천에 몰려와서 온궁과 그 인접동리에다 ‘운현궁 기지’라는 다섯 글자를 쓴 표목 8개를 둥그렇게 세우고, 온궁의 담장 대문에는 ‘십자 횡목’을 대고 쇳조각을 겹쳐 대어 못질을 하고 사라졌다.
데구찌와 아끼모또 일당이 지휘하는 특공대원들이 최초로 시도한 온궁 강점 행위였다.
이 때에 온궁 감관은 기세 등등한 일본인의 횡포에 위압 되어 그들의 신분이나 성명조차 확인하지 못한 채 읍내리로 달려가 온양 군수 권중억에게 보고하였고, 온양 군수는 이 사건을 궁내부 대신에게 보고하였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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