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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독립유공자(2) 이남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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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2일(화) 08:52 [(주)온양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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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온양신문 | 수당 이남규 선생은 1855년 11월 3일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에서 부친 호직과 모친 청송 심씨 사이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동부도사(東部都事)를 역임한 부친으로부터 한학을 배웠는데, 선생의 집안은 고려시대 가정 이곡과 목은 이색·조선시대 이산해와 이경전 등 이름 높은 유학자와 재상을 배출한 유가의 명문으로써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학문의 전통이 매우 깊었다.
전통 가학을 익히면서 선생은 7세 때부터 조선후기 실학자인 성호 이익과 안정복의 학풍을 잇는 당시 기호유림의 대표적 성리학자 성재 허전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러던 중 선생은 개항 직전인 1875년 향시(鄕試)인 사마시(司馬試) 양과(兩科)에 합격했고, 임오군란이 발생한 1882년 4월에는 경복궁 춘당대에서 시행된 정시(庭試)에서 문과(文科)에 급제했다. 그리하여 선생은 다음해인 1883년에 외교문서를 관장하던 승문원(承文院)의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에 임명돼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선생은 1894년 갑오경장 직후 외직인 영흥부사(永興府使)로 나가기까지 서학교수(西學敎授),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사간(司諫),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장령(掌令)·집의(執義),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부응교(副應敎)·응교(應敎),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우승지(右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형조참의(刑曹參議) 등 청환(淸宦) 요직(要職)을 두루 거치며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유가사상을 구현해 갔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자 일제는 이를 한반도 침략의 호기로 삼아 1894년 5월 7일 군대를 파견하는 등 조선에 대한 침략책동을 가속화했다.
이에 동학농민군 지도부와 우리 정부는 5월 8일 ‘전주화약(全州和約)’을 체결해 외세 개입의 소지를 제거했지만, 일제는 ‘자국 상민의 보호’를 명목으로 군대를 철수시키지 않고 오히려 도성에 진주시켰다.
선생은 이같이 일제의 침략책동이 노골화하자 ‘논비요급왜병입도소(論匪擾及倭兵入都疏)’를 올려 우리가 구원을 청한 적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본이 강제로 군대를 거느리고 도성 안으로 들어왔다는 점을 인식시키면서, 갑옷을 수선하고 병기를 손질해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했다.
1894년 6월 21일 일제는 군대를 동원해 경복궁을 점령한 뒤, 민씨 정권을 전복하고 친일정권을 수립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같이 군사 쿠데타적 방식으로 일제가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고 임금을 능멸하자, 선생은 즉각 ‘청절왜소(請絶倭疏)’를 올려 일본이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면 관항(關港)을 닫고 조약을 폐기하는 동시에 세계 각국과 힘을 합쳐 일제를 토벌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일제의 만행은 그치지 않았고, 지속적인 자국 세력의 확대를 위해 1895년 8월 20일 배일파의 핵심인물인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친일정부를 사주해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한 술책의 일환으로 명성황후의 폐서인(廢庶人) 조칙(詔勅)을 건의해 관철시켰다.
이에 선생은 곧바로 ‘청복왕후위호 토적복수소(請復王后位號 討賊復讐疏)’를 올려 격렬하게 맞섰다. 선생은 여기에서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와 일제의 사주 아래 이루어진 왕후의 폐서인 조칙을 신랄하게 규탄했다.
나아가 선생은 왕후의 위호를 우선 복위시킨 뒤 일제의 만행을 세계 만방에 널리 알리고 동맹국들과 함께 일제를 쳐 국모의 원수를 갚자고 주장했다.
그리고 뒤따라 일제가 친일정권을 사주해 그 해 11월 15일 소위 ‘을미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斷髮令)을 내리자, 선생은 이에 반대해 영흥부사의 직을 사퇴하고 향리(鄕里)인 충남 예산으로 귀향했다.
이후 선생은 안동부(安東府) 관찰사(觀察使)·중추원(中樞院) 의관(議官)·비서원승(秘書院丞)·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함경남북도 안렴사(按廉使) 등에 임명됐으나 잇달아 사직하고 향리에서 칩거했다.
일제는 러일전쟁 승전 직후 제국주의 열강의 양해 아래 1905년 11월 18일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해 우리의 자주적 외교권과 통치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같은 국망의 상황이 도래하자 선생은 ‘청토적소(請討賊疏)’를 올려 “불의(不義)로 존재함은 의로움에 망하는 것만 같지 못하고, 불의로 사는 것은 의로움에 죽는 것만 같지 못하옵니다.”라고 하며 매국적의 처단과 일제와의 일대 격전을 주장했다.
전 참판(參判) 민종식이 충남 홍산에서 의병을 일으켜 1906년 5월 19일 홍주성을 탈환하자 선생은 물심양면에서의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민종식의 홍주성 의진은 선생을 선봉장으로 내세워 유림의 협조와 지역 주민의 지지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 뒤 이 의진이 홍주성에서 10여 일 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일본군에 패해 민종식 의병장이 피신하게 되자 선생은 그를 예산 향제(鄕第)인 평원정(平遠亭)에 숨겨 주는 등 배후에서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하여 선생과 선생의 장자인 충구는 일본군에 피체되어 공주감옥에서 혹독한 형벌을 당했으나 결코 굴복하지 않았으므로 한 달 만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 뒤 일제는 1907년 6월 헤이그 특사 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光武皇帝)를 강제 퇴위시키고 그 해 7월 24일 <정미7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해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키는 등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해 갔고, 이러한 준식민지적 상황이 도래하자 해산 군인들이 의진에 참여함으로써 의병운동은 이제 국민전쟁으로 확대돼 갔다.
이에 일본군은 선생에 대한 경계와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다가 1907년 9월 26일 선생이 거처하던 평원정을 포위하고 선생을 포박 압송하려 했다. 그러나 선생은 “선비는 죽이기는 해도 욕보일 수는 없다.”라고 꾸짖고 스스로 가마에 올라 집을 나섰다.
가마가 충남 아산군 송악면 평촌리 냇가에 이르자 일본군은 길을 멈추고 선생을 마지막으로 회유하려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생은 “죽이려면 죽일 뿐이지 무슨 말이 많으냐.”고 하면서 조금도 굴복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일본군은 선생을 회유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칼로 선생을 죽이려 했다. 그러자 선생을 따르던 맏아들 충구와 가마를 메고 가던 김응길이 온 몸으로 일본군의 칼을 막았지만, 결국 선생과 함께 피살돼 순국하고 말았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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