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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고장 독립유공자(4) 김복한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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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04월 18일(월) 16:24 [(주)온양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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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온양신문 | | 김복한 선생은 1860년 7월 24일에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태어났다. 사람됨이 헌앙(軒昻)하고 지조가 굳었다.
1892년에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급제해 교리(校理)와 양사(兩司)에 제수됐고, 다음 해에 사서(司書)에 제수되고 통정(通政)으로 승임되었으며, 이어 대사성·형조참의(大司成, 刑曹參議) 등을 거쳐 1894년에 승지(承旨)에 제수됐다.
그러나 그 해 6월에 갑오개혁이 시작되고 일본식의 신제도가 채택되자 지조를 지키기 위해 관직을 버리고 고향 충남 홍주로 귀향했다.
1895년 을미사변이 발생하고 단발령이 내려지자 그는 이대로 수수방관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의 내종형이 되는 전 승지 이설과 함께 동학농민운동 수습에 큰 공을 세워 관찰사로 임용된 이승우를 설득하여 창의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승우는 이에 대해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 때 홍주 남쪽에 살고 있던 안창식은 아들 안병찬과 함께 박창로·이봉학·이세영·정제기·송병직·조병고·김정하 등과 의논해 민병 180명을 소집한 후 채광묵으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도록 하여 거사할 준비를 마쳤다. 이와 더불어 박창로, 청양(靑陽) 현감 정인희 등도 의병 수백 명씩을 보내 후원했다.
이에 용기 백배해 송병직·이세영 등이 관문으로 들어가 새로이 설치한 경무청을 부수고 참서관(參書官) 함인학·경무관(警務官) 강인선을 포박하고 죽이고자 했다. 일이 이쯤 발전되자 그때까지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던 이승우가 창의하는 데에 협조할 것을 약조한 후 스스로 관찰사라는 일본식의 관명을 버리고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이 되어 각 포구와 열읍에 창의한 것을 알렸다.
1895년 12월 3일 각 의병진의 대표들이 김복한을 수석으로 삼고 홍주 관하의 각 고을과 공주부(公州府)의 각 면으로 통문을 보내 독자·노약자를 제외하고 집마다 군정 1명씩을 징집케 하였다. 이 일을 추진하기 위해 송병직을 서면 소모관으로, 채광묵·이창서를 남면 소모관으로 삼고 이세영·이봉학·이병승을 공주로 파견했으며 박창로·정제기는 임존산성을 수비하도록 내보냈다. 오직 성안에는 김복한·홍건·안병찬·이상린이 남아서 창의소 일을 관장하고 있었다.
12월 4일 김복한과 이설이 성중 본부에 있는데 관찰사 이승우의 초청을 받았다. 수상하게 여겨 여러 사람이 구하려고 하는데 강호선이 순검들을 데리고 와서 체포하여 구금했다. 안병찬·이상린 등이 관문을 부수고 구하고자 했으나 그들 역시 체포당했고, 결국 의진의 수뇌격 인사들이 차례로 구금됐다.
김복한은 체포되자 함께 수감된 안병찬에게 “일이 이미 실패했으니 죽을 따름이다”라고 하며 죽음을 각오하고 장례 및 후사까지 유언했다. 그리고 절조 없는 이승우를 믿었던 자신을 자책했다.
을미 홍주의병에 관련돼 체포된 23명 중 김복한·이설·안병찬·송병직·이상린·홍건 등 6명이 서울로 압송돼 갔고 이들은 1896년 2월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에게 문초를 받았다.
2월 25일 김복한은 10년 유형을, 홍건·이상린·송병직·안병찬은 3년 유형을, 이설은 곤장 80대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고종은 이들의 충성심을 감안해 그날 밤으로 모두 석방하고 아울러 홍주의진에 관련돼 홍주성에 수감된 17인도 모두 석방하도록 특지(特旨)를 내렸다.
1905년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을사의병이 거국적으로 일어났고, 을미의병의 동지인 안병찬이 민종식과 더불어 의병을 일으켜 일군과 크게 접전하다 1906년 2월 23일에 체포됐다. 그러자 김복한은 당시 병을 앓고 있던 몸을 이끌고 이설과 함께 서울에 올라와 상소하며 역적을 처벌할 것을 성토했고, 이 일로 인해 1개월 간 투옥됐다가 석방됐다.
그 이후 안병찬과 함께 의거한 민종식은 홍주 방면으로 진출한 후 유준근·이식 등의 추대로 의병대장이 돼 1906년 4월 26일 홍주성에 입성했고, 만여 명의 연합의진이 구성됐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내통으로 인해 홍주성이 함락됐고, 일제는 이어 의병관계자 소탕전을 전개하여 겨우 피신해 의병운동을 전개하던 민종식·이용규 등을 모두 체포했다.
김복한은 이들 민종식 등 홍주의진과 연루됐다 하여 10월 28일 공주부(公州府)의 관헌들에 의해 체포돼 11월 1일 서울로 압송된 후 문초를 받으며 형용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문초의 내용은 민종식과 을미의병과의 관계 등이었다. 결국 민종식과 의병활동을 전개했다는 증거를 찾지 못한 일제는 11월 26일 김복한을 석방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1907년 10월 또다시 홍주의진의 인물들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10월 1일에 안병찬 형제·윤난수·이필한·조광희 등 5인이 홍주에서 체포·구금됐다가 공주부로 압송됐고, 13일에는 김복한·박홍양·이훈영이 보령에서 체포돼 공주부로 압송됐다. 김복한은 압송되던 길에 조현에 이르러 일인 순사에게 군사를 주둔시켜 둔 곳을 밝히라는 강요를 받으며 곤장으로 두들겨 맞고 위협 사격까지 받았다.
1919년에 3·1운동이 일어나자 그는 파리평화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를 작성·서명하는데 참여했는데, 서명자 137명이 모두 일경에 체포되고 그는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순국했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975년 8월에 평소 선생을 존경하던 인사들과 문하인들의 발의로 홍성군수 조영호가 군비 300만원을 들여 추양사를 준공했고, 그 후 홍성군수로 부임한 이관현이 군비 500만 원을 투입해 저와사업에 착수하고 밭 2천99평과 논 308평과 산 1031평을 매수해 사역(祠域)을 확대·정화했다. 추양사에서는 문집을 간행하고 유품을 전시하며 매년 음력 3월 15일에 유림과 후손이 향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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