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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강탈당한 온궁 리한구 <온양신문 대표이사> 근엄하고 웅장했던 온궁의 자태를 지금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 일본인 등본영(藤本榮)외 13인이 광무8년 8월(서기 1904년 8월)에 돌연 찾아와 궁문(宮門)에 십자형 판자를 부착, 봉쇄하고 우리나라 사람의 접근을 금지케 함으로써 당시 온양군수 권중억은 이 사실을 화급히 상부에 보고하고 외부대신 서리 외부협판 윤치호는 다시 외부대신 이하영에게 보고하고 수습책을 요청했으나 속수무책이었고, 친일 내각의 위상을 그대로 드러냈다. 이리하여 온궁은 운현궁기지(雲峴宮基址)라고 하였으며 뒤늦게 제수사기지라 개칭했다. 일본인들은 조선사람 이좌형, 박봉교, 김수성, 정성호, 이승삼, 예종석 등으로부터 권한을 양도받아 정당한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니 간섭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또 일본인들은 조선 궁내부대신의 인가를 받았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궁내부 대신 임시서리 예식원, 장예경, 이원일은 인가한 바 없다고 하였다. 그당시 궁 내부대신은 민영철이었다. 흥망이 유수한 세월속에 그래도 영괴대와 괴목만이 지금도 의연하게 역사를 소상히 증명하고 있는 듯 하다. 신정관에서 관광호텔로 명칭이 변경됨에 따라 건물의 구조거 점진적으로 현대회됐다. 이렇게 변하고 저렇게 변해도 이 곳 주민들은 아무도 온궁에 대한 말은 정확히 90년이 지나도록 없었다. 역사에 관심있는 일부 인사만이 안타까워 하면서 그것도 술좌석에서 한탄어린 어조로 두어마디할 뿐 응조하는 사람이 없어 말꼬리가 흐려진다. 시장 군수도 아닌 문화부장관까지 지낸 사람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다만 온양신문 창간 10주년이 되면서 이것저것 살피다가 균장각 문서가 김백선 선생으로부터 전해져 왔다. 온궁의 정체 문서에 의해 드러나고 온양신문에 기사가 간혹 보도됨에 따라 조금씩 관심있는 사람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참으로 반가운 일이다. 시당국자도 관심을 나타냈다. 장차 「온궁문제」가 어떻게 다루어질지 알수 없으나 온궁이 복원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면 온양은 번영의 관광지가 될것이다. 찬란했던 역사의 온양이 어찌하여 아산으로 호칭케 됐는지… 알 것 같으면서 모르겠다. 아직도 온양을 아산으로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니 또한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만 득(得)과 실(失)을 명확하게 헤아려 보았으면 한다. 일제때믄 고장 명칭을 그 곳 주된 도시명칭을 따라서 호칭했다. 우리 온양은 온양경찰서, 온양 우체국, 온양전매서, 온양곡물검사소, 온양수리조합, 온양온천역 모두를 온양으로 했다. 그러나 군청만은 「아산군청」이라고 했다. 왜 유독 아산군청이라고 했을까? 여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온양문화제 이사장인 김동직 선생과 시인 홍병선씨의 주장과 같이 일본은 청국과 전쟁을 하여 아산만에서 대승했다. 이 대첩을 영원히 역사에 빛내기 위해 아산군청이란 명칭을 사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일제의 잔재를 그대로 세습한 것처럼 됐으니 이는 무식해서인지 일제 잔존사상때문인지 무어라고 해야할 지 모르겠다. 온궁은 우리에게 크나큰 존재이며 번영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 또 무과시험장도 같다. 규장각 문헌에 용화동을 어전평(御前坪)이라고 호칭한 듯하다. 어쨌든 이 고장 사람들이 관심없고 무지해서 역사 유적지를 보존 못하고 사라지게 한 것이 한없이 부끄럽다. 우리는 뒤늦은 것이지만 향토사를 보존하고 향토사를 밝혀내어 우리고장 문화를 빛내야 하겠다. 아직 잘못된 것과 일본식 잔재가 무엇인지 모르고 당연한 것처럼 인식하고 있어 이것들을 서로가 충고하고 일깨워가면서 내고장 문화를 빛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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