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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 때 증축이후 4대 걸쳐 온행

현종, 숙종, 영조, 장헌세자…최전성기

2013년 02월 22일(금) 15:23 [(주)온양신문사]

 

'온천대축제, 다시 온천이다'
③ 조선 후기 온양행궁의 복원과 증축

<편집자註> 이 논문은 지난 2010년 10월 5일에 ‘한국 온천문화 전통의 발견과 창조적 계승―온천학(溫泉學) 정립을 위한 역사학적 모색’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제2차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한 것이다. 이 논문은 아산지역 온천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조선 말기까지 온양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온양행궁의 건립과 그 변천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 김일환 /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 수석연구원

ⓒ 온양신문

임진란 이후 파괴되고 더럽혀진 온궁이 다시 복원된 것은 조선 후기 현종초였다. 현종은 지병인 습창과 안질을 치료하기 위해 동왕 6년(1665)부터 전후 다섯 차례나 온양온천을 찾아왔다.

온양행행(溫陽行幸)의 약자인 ‘온행(溫幸)’이란 용어가 처음으로 쓰이는 것도 현종대 부터이다. 현종이 신병 치료를 위해 온양행을 결정한 것은 온양에 옛 행궁의 유지(遺址)가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현종은 온행을 결심하자 온궁 복구에 착수했다. 옛 행궁터에 신축하는 온궁은 민폐에 대한 우려가 컸기 때문에 무척 소박하게 지어졌다.

온궁의 구조는 서쪽에 어실(御室·6칸8작)과 온정실(溫井室), 곧 탕실(湯室·8칸)을 짓고 부속건물은 모두 초사(草舍)로 해 전체가 100여 칸 정도였다. 처음에는 담장 밖에 임시로 지은 집이 150여 칸이 됐는데, 나중에 전체가 100여 칸 정도라는 것을 보아 현종이 민폐에 대한 우려로 약간 줄인 것 같다. 어실 세 군데에는 담장을 둘 러 다른 공간과 구분을 지었다. 이 당시 행궁은 흙으로 계단을 만들어 전체적으로 보면 초라할 정도로 검소했다.

행궁의 주위는 포장(布帳)으로 둘러쌌다. 바깥포장은 둘레가 500보로 도성문을 모방했고 대신들과 정리사(整理使)들이 머물렀다. 안포장은 둘레가 300보로 궁성문을 모방했는데 승정원, 옥당, 병조, 도총부 및 시위하는 여러 장수들이 입직했다. 그 나머지 각사들은 모두 외작문(外作門) 바깥으로 나가 위치했다.

이 때 지어진 온궁은 비록 구조상 소박하지만 정조대 온궁사실(溫宮事實)에 실려, 우리가 온궁의 전형적 형태로 알고 있는 ‘온양별궁전도’속에 그려진 온궁의 시원(始原)이 된다.

첫 번째 온행으로 질병치유의 효과를 크게 본 현종은 다음 해에 병든 어머니 인선대비를 모시고 갈 결심을 하면서 온양 행궁을 증축하려고 계획했다. 이때는 온궁이 사치스러울 정도로 화려해, 헌납 윤변이 민폐에 따른 우려 때문에 격렬히 반대했지만 예정대로 추진됐다.

우선 자전(慈殿)이 머물 어실을 새로 건축했다. 비록 백관들이 쓰는 가가(假家)와 가까워 문제가 있었지만 새로 짓는 자전의 어실은 동쪽에 있는 옛 행궁자리에 지었다. 또 구기(舊基)는 계단이 너무 높아 두어 개의 계단을 제거해 땅을 평평하게 만들고, 집은 4칸으로 짓되 비좁지 않게 했다. 사용한 재목은 서울에서 내려 보냈다.

탕실도 바뀌어 북탕은 침실 북쪽의 내궁장의 바깥에 있고 옆에는 세조대에 세운 신정비가 있었다. 이런 북탕은 백관들이 목욕하는 장소로 제공됐다. 이때부터 군신(群臣)들에게도 온궁에서 목욕할 기회를 주는 것이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이러한 결과 증축된 온궁은 규모가 커져 둘레가 1천758척이며 내정전이 16칸, 외정전이 12칸, 탕실이 12칸으로 확장됐다. 현종 5년에 6칸8작이던 어실이 16칸의 내정전으로 변모했고, 온정실, 곧 탕실은 8칸에서 12칸으로 확장되었다. 정무공간인 외정전은 이 무렵 새로 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이를 미루어 부대시설도 모두 이전보다 확장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 결과 온궁은 <그림 1>에서 보듯이 정전을 에워싸고 많은 건물이 들어찬 화려한 궁궐의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었다.

↑↑ ▲<그림 1>
영괴대기(靈槐臺記·서울대 규장각 奎10179)에 그려있는 1795년(정조19) 무렵의 온양별궁전도. 위 그림은 정조 19년(1795)에 발간된 온궁사실에 수록된 ‘온양별궁전도’이다. 이 그림은 완전하게 복원된 온궁의 모습을 보여준다.

ⓒ 온양신문

한편 국왕이 온궁에 행행하면 위 그림보다 훨씬 넓은 공간을 점유했다. 그것은 국왕을 수행해 온양에 오는 인원이 적으면 900여명, 많으면 7천500명 정도로 대규모였다. 따라서 이 많은 수행원을 지공하기 위해 충청 관찰사를 중심으로 호서 지방의 전체 수령이 동원됐다. 이들은 각각 수발할 대상 기관을 나누어 지공을 분담했다.

이를 위해 가가(假家)라 불리는 임시 건물과 포막(布幕)이 온궁 주변에 다수 설치돼 온궁을 에워쌌다. 그래도 부족한 공간은 민간의 집을 징발했으므로 집을 빼앗긴 백성들이 국왕의 온행 기간 동안에 노숙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현종대부터 숙종, 영조, 장헌세자까지 4대에 걸쳐 국왕과 왕세자가 온행을 이어갔기 때문에 온양 행궁은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기간은 현종 6년(1665)에서 장헌세자의 온행이 있었던 영조 36년(1760)까지 95년이었다.

온양신문사 기자  ion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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