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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고려시대부터 왕실온천 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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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조에 온양행궁 건립되며 입지 다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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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2월 06일(수) 15:15 [(주)온양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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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천대축제, 다시 온천이다
② 온양온천의 역사와 온양행궁 건립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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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일환(아산학연구소 수석연구원) | ⓒ 온양신문 | 온양이 온천지로 사료에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부터다. 백제 온조왕 36년(18)에 탕정성(湯井城)을 쌓았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탕정’은 ‘끓는 물이 나오는 우물’이란 뜻으로 이것이 지명이 됐다는 것은 온양이 오래 전부터 온천이 분출되는 지역이었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온양이 온천지대라는 것은 일찍이 기원 전후부터 공인된 사실이었다.
탕정성에서 유래돼 온양은 백제 때 탕정군이 됐다. 이 지명은 통일신라기에도 이어져 문무왕 11년(671)에 탕정주가 되었고 신문왕 1년(681)에 군으로 바뀌었다.
그러면 온양에 대한 역대 국왕들의 방문은 언재부터 시작됐을까?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왕이 동왕 43년(25) 8월에 아산원(牙山原)에서 5일 동안 사냥을 한 적이 있었다. 이것이 온천행과 직접 관련되는지는 사료의 부족으로 명확히 알 수 없다.
삼국통일 후에는 성덕왕 11년(712) 4월에 왕이 온수(溫水;지금의 온양)에 행행(行幸)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을 필자는 국왕이 온천을 목적으로 온양에 온 최초의 기록이라고 본다.
- 조선 세종때 왕궁 지어
고려시대에 들어와 탕정군은 온수군(溫水郡)으로 지명이 바뀌었다. ‘온수’라는 지명도 여전히 이곳이 온천지임을 확인해 준다고 할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온천욕이 유행해 왕실 가족이 온천지를 찾아간 기록이 많다.
당시 왕실 가족들이 주로 이용한 온천은 왕도인 개성과 가까운 황해도 평주였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문종 대에는 국왕이 온양온천을 찾아와 목욕을 한 사례가 있다. 이것은 고려시대 국왕이 온천욕을 목적으로 온양을 방문한 최초의 기록이다. 문종은 동왕 36년(1082) 9월에 개성을 출발해 온수군은 을사일에 도착했다.
그는 이때부터 10월 경신일까지 15일간 온수군에 머물며 온천욕을 했다. 이 기간 동안 문종은 여가 중에 신하들과 시문답을 주고받기도 했다. 문종이 온천을 떠날 때에는 재상들이 글을 올려 국왕이 온천에 행차한 것을 축하하기도 했다.
한편 문종은 온양온천에 행행하던 중 행차가 지나가는 주현(州縣)의 역로(驛路), 역점(驛站)에 그 해의 조세의 절반을 면제해 주면서 백성들에게 왕의 덕화(德化)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러한 문종의 온양온천행은 조선시대 역대 국왕들이 탕치(湯治)와 민정시찰을 목적으로 온행(溫幸)하던 사례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 점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온양은 일찍이 기원 전후부터 온천지로 알려졌고,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여러 국왕이 온천욕을 목적으로 찾 아온 역사가 상당히 오래된 온천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온양은 세종대에 들어와 새로운 왕실 온천지로 자리 잡는다. 이것은 세종조에 온양행궁이 건립되고, 3차례나 국왕의 온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조선조에 온양온천을 처음 찾은 국왕은 태조였다. 태조는 온양온천에 꼭 한 번 온 적이 있었다. 그는 동왕 5년(1396) 3월 10일 서울을 떠나 지금의 천안시 직산에서 사냥을 하고 3월 16일 온양에 도착했다. 이후 보름을 온양에서 머물다 4월 1일 지금의 천안인 영주(寧州)를 거쳐 광주(경기도)를 지나 4월 7일에 귀경했다.
이 때 국왕이 머무는 임시거처로 행궁이 지어졌다. 기록에는 동왕 5년 3월에 승려들을 시켜 원(院)집에 숙소를 지었다고 한다. 이것이 국왕이 머무는 공간으로 행궁이 온양에 지어진 시작이다. 그러나 이는 온정(溫井) 위에 세운 제대로 된 온궁이라고 보기가 어렵다.
본격적인 온양행궁, 곧 온궁은 세종대에 들어와서 건립됐다. 세종이 자신의 풍질을 치료하기 위해 온양행을 결정한 것은 동왕 14년(1432) 9월이었다. 하지만 국왕의 온천행행은 민에 대한 부담이 크므로 폐단이 백성에게 미치는 것이 가장 큰 고민이었다.
그중 숙소와 목욕시설이 있는 온궁의 축조가 가장 큰 문제였다. 세종은 민폐를 줄이기 위해 온궁을 짓더라도 사치하거나 크게 짓지 못하게 했다. 그 결과 대언(代言) 등이 동행할 삼전(三殿)의 욕실과 침실의 체제를 그림으로 그려서 올리자, 세종이 직접 보고 그 수효를 감하게 했다. 이것이 온양에 온궁이 본격적으로 지어진 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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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온양행궁 전도 | ⓒ 온양신문 | | - 온양현 서쪽 7리 지점에 온궁 건립
온궁이 완전하게 지어진 것은 세종 15년(1433) 1월이었다. 당시 온궁은 온양현의 관아에서 서쪽으로 7리 떨어진 언한동(言閑洞)에 위치했다. 집의 크기는 25칸으로 작은 규모였다. 그 구조는 정무 공간인 정청(正廳)이 있고 동, 서 양쪽으로 두개의 침실이 있었다. 목욕시설인 탕실은 두 개가 있어 남북으로 상탕자(上湯子)가 있고 그 아래 차탕자(次湯子)가 있었다.
상탕자는 후대에 북탕(北湯)으로 지칭된 시설로 짐작되는데 왕대비, 대비, 왕비 등 왕실 여성들의 목욕 공간으로 보인다. 이 공간은 여성들의 전용공간이므로 아름다운 돌로 장식하여 화려한 모습을 띠었다 한다. 차탕자는 국왕이 목욕하던 공간으로 후대에 남탕(南湯)으로 지칭된다. 이러한 건물 주변에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는 나머지 집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 일반백성, 병자까지 목욕하게 개방
세종의 1차 온행이 끝나고 귀경한 후에 온궁의 구조는 새롭게 변경됐다. 그것은 국왕이 온행하지 않을 때 백성들이 온천을 이용할 수 있도록 세종이 온궁 운영의 개선책을 명했기 때문이다.
세종은 왕실의 전용 공간인 정청, 침실, 북탕자는 자신이 환궁한 후 봉쇄하였지만 나머지 시설은 모두 백성들에게 개방하였다. 우선 차탕자는 사족남녀에게 개방해 이들로 하여금 목욕케 했다. 다시 남북의 빈 땅에는 새로운 탕자와 집을 짓게 했다. 또 月臺 아래 온수가 용출하는 곳에는 우물을 파고 집을 지어 일반 백성들 대소남녀가 모두 목욕하게 하였다. 이것이 나중에 하탕(下湯)으로 지칭되는 욕탕이다.
이와 같이 세종은 왕실 뿐 아니라 사대부, 일반 백성들에 이르기 까지 병든 사람은 모두 온천을 이용할 수 있도록 온궁 시설을 확장한 것이었다. 따라서 세종대 온양 온궁은 왕과 백성이 함께 온천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여 여민동락(與民同樂)과 유교적 민본정치의 실천장이 됐다. 이렇게 왕실, 사대부, 일반 백성들의 공간으로 나뉘어 삼탕으로 구성된 탕실 구조는 후대까지 계승되어 조선 말기까지 유지됐다.
- 세조때 대군·왕자 왕실가족 자주 찾아 온궁 관리 강화
이후 세조대에는 수직인 3호를 두었다. 이들에게는 한전(閑田)으로 각각 1결 50부를 주고 복역해 완호하게 하는 등 온양온천의 관리 체제를 강화했다.
한편 환관과 선공감 관리를 보내 온정(溫井)을 보수하기도 했다. 이것은 당시에 대군, 왕자, 공주, 옹주 등 왕실 가족들의 빈번한 온양온천행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시설의 보수가 이루어졌다고 보인다.
성종 14년 기록에 의하면 어실 외에도 세자궁 침실의 존재가 확인된다. 이것을 통해 온궁의 규모가 확장됐음을 짐작케 한다. 이후에도 후궁 이나 사대부 관료들의 온양온천행은 활발하게 이어졌다.
왕실의 온행은 성종 14년(1483)에 정희왕후, 안순황후, 소혜황후가 온궁을 다녀간 것을 마지막으로 조선후기 현종 6년(1665)에 이르는 182년 동안 끊어졌다. 그러나 이것은 국왕이 행행하지 않았다는 것 뿐이지 대군, 왕자, 부마, 사대부 관료층 등과 일반 백성으로 질환자들은 여전히 온양온천을 찾아 질병 치료를 계속했다.
- 임진왜란 발발로 온군 쇄퇴
하지만 국왕의 행행이 중단되자 온궁도 점차 쇠퇴했다. 이것을 더욱 촉진한 것은 임진왜란이었다. 임진왜란이 발발한지 5년 후 선조 30년(1597)에 재발한 정유재란은 왜군이 전라도를 따라 올라와 공주, 아산을 지나 서울을 향해 북상하던 중에 온양을 급습했다.
또 직산 소사평에서 조ㆍ명연합군에게 패퇴하여 남하하면서 다시 한 번 아산 지역을 유린했다. 이 와중에 온양은 초토화됐고 이때 온궁도 불타버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온궁은 오랫동안 복구되지 못하고 폐허로 방치된 채 병자들만 찾아와 목욕을 했다.
이 무렵 선조는 자신의 질병을 치유하기 위해 온양으로 온행할 의사를 피력한 적은 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정유재란 이후라서 민폐에 대한 우려와 함께 약방 관료들이 온천 무효험론을 내세워 반대했기 때문이다. 다만 나중에 온양의 온천수를 서울 궁궐로 길어와 치료한 적은 있었다.
<편집자註> 이 논문은 지난 2010년 10월 5일에 ‘한국 온천문화 전통의 발견과 창조적 계승―온천학(溫泉學) 정립을 위한 역사학적 모색’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제2차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한 것이다. 이 논문은 아산지역 온천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조선 말기까지 온양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온양행궁의 건립과 그 변천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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