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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의 효성이 깃든 영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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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장헌세자의 온행(溫行)과 영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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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03월 11일(월) 13:58 [(주)온양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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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註> 이 논문은 지난 2010년 10월 5일에 ‘한국 온천문화 전통의 발견과 창조적 계승―온천학(溫泉學) 정립을 위한 역사학적 모색’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제2차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한 것이다. 이 논문은 아산지역 온천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조선 말기까지 온양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온양행궁의 건립과 그 변천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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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일환(아산학연구소 수석연구원) | ⓒ 온양신문 | 영조대에 이르면 온궁에는 기존 온천시설과 달리 ‘영괴대(靈槐臺)’라는 새로운 축조물이 행궁의 공간에 들어선다. 영괴대는 장헌세자에 의해 세워진 사대(射臺;활터)이다.
장헌세자는 질병 치료를 위해 영조 36년(1760) 7월 온궁에 왔다. 그는 온천욕을 하던 여가에 활쏘기를 즐기다가 5시5중(五矢五中;다섯발 쏴서 다섯발을 모두 맞춤)하는 몰기(沒技;백발백중)를 이루었다. 이는 쉬운 일이 아니어서 일반 백성도 이럴 때는 잔치를 베푸는 것이 보통이었다.
다산(茶山) 정약용의 말에 의하면 장헌세자는 이것을 기념하기 위해 자신이 활을 쏘던 사대에 홰나무를 손수 한그루 심고 단(壇)을 둘러쌓도록 분부했다 한다.
- 정치 역경에 따라 홰나무도 부칠 있어
그러나 고을 관리들이 이 말을 듣지 않았다 한다. 그것은 향후 상경한 장헌세자가 2년 후 복잡하게 전개되는 당쟁의 한가운데에서 비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했기에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따라서 장헌세자가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리고 급기야 죽음으로 생을 끝나게 됨으로 그가 온궁에 심은 홰나무도 잊혀졌다.
그런데 이 홰나무의 존재를 부각시키고 그 보존을 처음으로 거론한 인물이 정약용이었다. 예문관 검열이던 정약용은 정조 14년(1790) 3월 그의 나이 29세에 소관(小官)으로서 패소(牌招)를 어겼다하여 일시적으로 해미로 유배를 간 적이 있었다. 유배는 불과 10여일 만에 끝나서 풀려난 다산은 귀경길에 덕산을 지나 온양에 들렸다.
- 다산 온궁 머물며 얽힌 사연 시로 읊어
그는 온양에 잠시 머물며 온궁을 찾았는데 아래의 자작시에서 보듯 그곳에서 다산은 장헌세자가 심은 홰나무와 거기에 얽힌 사연 뿐 아니라 온양지역민들에게 베푼 세자의 성덕(聖德)도 알게 된 것이다.
경진년 과거사를 또렷하게도
유민들이 이제껏 얘기를 하네
복성이 세자 행차 따라왔는데
한밤중 높고 맑은 노래 들렸네
쌀 주어 망가진 밭 보상하였고
조세 감면 장마의 피해 위문해
내린 분부 사신이 따르지 않아
울분에 찬 백성들 마음보겠네
여기서 다산은 세자가 홰나무 한 그루를 손수 심은 뒤에 단을 둘러쌓도록 분부했지만, 그가 떠난 뒤 그 고을 수령이 그 분부를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았다.
게다가 다산을 가슴 아프게 한 것은 또다른 시에서 보듯이 초라하기 짝이 없는 홰나무의 모습이었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나무가 울퉁불퉁하게 오그라들어 볼품이 없는데다가 덩굴에 덮이고 잡초에 묻혀 뭇 아이들의 놀이 대상이 될 정도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분노하고 가슴아파한 다산은 그의 시에서 자신이 상경하면 정조에 건의하여 그 보존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소회를 피력하고 있다.
온천 행궁 안에 홰나무 한 그루가
오랜 세월 잡초에 매몰되어 묵히었네
오이덩굴 새삼덩굴 칭칭 서로 감기어
기운을 펴지 못하여 겨우 한 길 자랐는데
마른 가지 뻣뻣하고 줄기 옹이 맺혔거니
동궁께서 과거 손수 심으신 걸 누가 알리
이곳에서 동궁이 곰 과녁을 쏘실 적에
다섯 발의 철촉이 모두 눈알 명중했네
이에 귀한 나무 심어 그 자리를 기념하고
아울러 돌을 쌓아 단 만들게 하시었네
긴 가지 구름 스쳐 푸르름을 장차 보고
짙은 그늘 뜰 가득 깔릴 날을 바랐건만
푸른 깃발 한 번 떠나 소식이 감감하자
참새떼들 짹짹짹 저물녘에 모여드네
곁가지는 모두 다 뭇 아이들 올라타고
기와 조각 자갈들을 누가 한 번이라도 치웠던가
서글픔에 서성대며 차마 떠나지 못하고
얽힌 덩굴 손수 뜯어 울타리 사이 던지네
아, 이나무 그 누가 사랑하지 않을 건고
여보게들 행여나 자르거나 휘지 마소
내 장차 돌아가서 임금에게 아뢴 뒤엔
이 나무 천년토록 길이 존귀하고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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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독립기념관 소장 영괴대비각 사진. 촬영 시기는 미상 | ⓒ 온양신문 | 정조의 총신(寵臣)인 다산이 이 문제를 정조에게 실제로 어떻게 건의했는지는 사료가 없어 구체적으로 알 수 없지만 이후 정조의 태도를 보면 어떤 경로를 통했던지 간에 이 문제를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정조는 아버지의 태몽으로 태어난 사람이었다. 이렇듯이 부친의 각별한 사랑을 받았던 정조는 어려서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이후 국왕으로 즉위하고 나서 부친 장헌세자를 추모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수시로 아버지의 사당과 묘소를 찾아 갔고 여러 차례 존호를 올리고, 왕실족보의 내용을 수정하면서 부친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노력했다.
다산이 제기한 온양행궁의 홰나무 문제는 오랫동안 잠복해 있다가 본격으로 대두하는 것은 정조 19년(1795)이다. 이때는 다산이 온양을 다녀간 5년 이후였다.
이렇게 오랫동안 이 문제가 표면화될 수 없었던 것은 복잡한 정치적 사정이 내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장헌세자가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비참하게 죽은 후 어떤 형태든지 이 문제를 거론하는 것은 철저히 금기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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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영괴대비. 정조의 친필이다 | ⓒ 온양신문 | | - 온행에서 보여준 성덕에 명예회복
또한 장헌세자의 죽음에 깊이 관계된 노론벽파와 얽힌 정치적 파장도 큰 문제였다. 그러므로 정조가 부친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명예 회복을 시도하기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그런 가운데 정조 16년부터 영남 유생들의 만인소가 2차례 올라와 억울한 장헌세자의 죽음을 규명하고 역적을 타도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했다, 나아가 장헌세자가 온행하던 가운데 보여준 성덕이 칭송되면서 장헌세자에 대한 명예 회복이 본격적으로 거론됐다.
이런 가운데 장헌세자의 온양온천 행행시 백성에게 보여준 덕화(德化)와 홰나무 식목사건은 부친의 성덕을 추억하게 하는 좋은 소재였다. 그러자 정조는 동왕 19년 4월에 본격적으로 홰나무 보전을 위해 영괴대를 쌓고 비석을 세우는 작업을 추진했던 것이다.
영괴대의 축조는 지금까지 정조가 부친을 추창하기 위해 해오던 사업의 마지막 절정이었다. 그러므로 영괴대 축조 사실의 시말을 기록한 온궁사실(溫宮事實)과 영괴대기(靈槐臺記)는 온양 온궁을 한 번도 온 적이 없는 정조에게 그림으로 온궁과 영괴대 사실을 보고하기 위해 만들어진 보고서였다.
이 해는 마침 장헌세자가 60세가 되는 환갑년이었다. 영괴대 축조는 정조가 죽은 부친을 위해 바치는 환갑선물이기도 했다. 정조는 부친 장헌세자의 온행에 배종했던 사람들을 찾아 표창하는 일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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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현재의 영괴대비. 온양관광호텔내에 위치하고 있다. | ⓒ 온양신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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