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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의 [행복한 아산만들기]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온양신문 공동기획

2012년 11월 28일(수) 11:21 [(주)온양신문사]

 

임진왜란 때 송유진의 난의 현장, 연암산 개현사

↑↑ 김일환(아산학연구소 대우교수)

ⓒ 온양신문

음봉 포스코아파트 옆으로 꺾어 들어가면 월랑저수지가 있다. 여기서 더 올라가다가 월랑초등학교를 못 미쳐 왼편으로 방향을 돌리면 완만한 비포장도로를 만난다. 이 길을 따라 비스듬하게 올라가면 연암산(燕巖山)으로 통하는 골짜기와 연결된다.

이곳을 ‘개안골’이라 하며 줄여 ‘갱골’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곳 지명이 개안골이 된 것은 원래 이곳에 개현사(開現寺)라는 사찰이 있었기 때문이다.

연암산에는 조선초기부터 이름난 사찰이 많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아산현(牙山縣)’조를 보면 개현사 외에도 동심사(桐深寺), 연암사(燕巖寺), 용화사(龍華寺) 등이 있었다.

그 중 개현사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새로운 역사의 현장으로 우리 역사에 기록되어 그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다. 그것은 1594년(선조27) 1월, 아산과 직산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민중 반란사건인 송유진의 난의 근거지가 바로 개현사였기 때문이다.

원래 송유진은 서울 건천동(乾川洞;현재 서울 중구 인현동1가)에 집이 있었다. 그는 중인신분으로 그의 부친 송택종(宋澤宗)은 중국어 역관이었다. 송유진은 부친 덕분에 중국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

그는 24세이던 1591년(선조24) 겨울에 사학(四學) 중에 하나인 중학(中學)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일과(日課)를 잘 외우고 제술(製述)도 뛰어나 특별히 상을 받을 정도로 학식이 출중한 지식인이었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593년(선조26) 3월에 서울을 떠나 비교적 안전한 피난처인 천안으로 옮겨와 옛 친구 홍근(洪瑾)에게 의지하면서 어린아이들을 모아 서당을 열고 학장(學長) 노릇을 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후 송유진은 호서지방의 의병활동을 주도한 듯하다. 선조는 반란의 수괴라는 이유로 송유진을 경성 서족출신으로 도적과 무뢰배라고 폄하하였지만 당시 병조판서로 왕세자인 광해군을 수행하여 무군사(撫軍司)의 일원으로 전주에 가 있던 백사 이항복은 “송유진이 의병 가운데서 공을 가장 많이 세운 사람으로, 그가 싸움을 잘하여 공이 많은 실상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다.”라고 송유진이 호서지방에서 전투에 능하고 공을 가장 많이 세운 의병대장이었음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전란과 기근, 참혹한 수탈 속에 민의 고통이 깊어지고 민심의 이반이 심각해지자 이러한 변화를 읽은 송유진은 아산, 직산지역을 중심으로 민중 반란을 준비하였다. 그 반란의 근거지가 연암산 개현사였다.

개현사가 근거지가 된 것은 개현사의 위치가 북으로는 직산을 통해 기전(畿甸)과 경성에 도달하기가 쉽고, 좌우로는 천안, 온양, 신창과 공주 등을 통해 전라도 등 남부지방과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이다. 또 연암산 골짜기에 깊이 숨어 있어 반란 주모자들이 은신하여 활동하기에도 유리한 여건이었다.

당시 개현사는 일현(一玄)이라는 승려가 주재하고 있었는데, 그는 의병승장(義兵僧將)이었다. 개현사가 송유진 일당에게 점유된 것도 송유진과 의승(義僧)인 일현과 함께 의병활동을 하면서 서로 가깝고 친밀한 결과로 짐작된다. 이곳에서 송유진은 군대를 모으고 무기를 수집, 저장하였으며 동조자를 포섭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봉기를 준비하며 자신은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 처지이므로 우리가 그대들을 위해서 나왔다”고 하였다. 자신의 봉기가 시대적 모순을 극복하고 도탄에 빠져 죽어가는 백성의 삶을 구원함에 있음을 선포한 것이다. 송유진은 왕세자가 지휘하는 무군사(撫軍司)가 있는 전주에 다음과 같은 밀서를 보내며 당시의 시대적 모순을 정확히 진단하였다.

“임금의 악함은 고쳐지지 않고 붕당(朋黨)은 타파되지 않았다. 부역이 많고 중하니 생민이 편치 못하다. 목야(牧野)에서 용맹을 떨침에 비록 백이ㆍ숙제에게는 부끄러움이 있으나 백성을 위로하고 죄있는 자를 토벌하는 것은 실로 탕(湯)과 무왕(武王) 보다도 빛나도다.”

그는 백성을 버리고 도망간 선조와 붕당으로 국론을 분열시킨 지배층을 맹비난하고 부역과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의 고통을 적시(摘示)하고 있다. 따라서 자신의 사명은 탕왕과 무왕과 같이 세상의 불의를 부수고 새로운 세상을 여는 것임을 선언한 것이었다.

송유진은 동조자를 포섭하고 아산과 평택에 있는 관가의 무기창고를 털었으며, 아산의 부호인 임희지의 집으로 몰려가 궁시와 편전 등 무기를 빼앗았다. 그 뒤에도 계속 양반 부호의 집을 털어 거사에 필요한 물자를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인명을 해치지는 않았다.

송유진은 원래 군사들을 모아 1월 10일에 은밀하게 병기를 숨겨 가지고 경성에 쳐들어가기로 하였다. 이것을 위해 송유진은 서울의 동향을 예의주시하였다. 당시 민심이 떠나버린 선조는 전란초기에 선비들로부터 광해군에게 선위하는 것이 백성의 뜻이라는 상소를 받은 적이 있었다. 자신에 대한 민심이탈이 퇴위로 이어지지 않을까 노심초사하였다.

귀경 이후에는 대외적으로도 입지가 대단히 위태하여 명나라 조정까지 선조를 대하는 태도가 싸늘하였다. 명나라로부터 공공연히 왕위교체론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선조는 명나라 사신들에 대해 조차 대단히 저자세를 취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와중에 중국 황제가 보낸 칙서를 입수하여 선조에 대한 중국정부의 차가운 태도까지 알게 된 송유진은 무장한 반란군을 끌고 경성으로 들어가 선조가 임시로 머물고 있는 행궁 앞에서 3일을 통곡하며 국왕 선조의 퇴위를 종용할 계획이었다.

당시 전란 중에 경복궁이 불타 버려 선조는 정릉동에 있는 월산대군의 사저를 행궁으로 사용하고 있어 경비가 허술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다음에 전란 중의 분조활동으로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민심을 얻고 있던 왕세자 광해군을 왕으로 추대하면 백성들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거사일을 앞두고 변란의 주모자이며 옛 친구인 홍근(洪瑾)과 홍난생(洪蘭生)·홍우(洪瑀)·홍각(洪殼) 등이 배반하여 고변하였다. 송유진이 주도하는 변란을 알게 된 조정은 충청병사 변양준(邊良俊)을 시켜 그를 잡도록 하였고, 변양중은 무사 김응룡과 그의 조카 홍각(洪殼)을 통해 송유진을 유인하였다. 송유진이 10여 명의 부하를 데리고 직산으로 나왔을 때 김응룡이 미리 잠복시킨 역사들을 시켜 송유진 일당을 체포했다.

이들은 수로를 통해 서울에 압송되어 문초를 받고 모두 능지처사에 처해졌다. 송유진의 나이 30세였다. 송유진 난의 결과 주모자급으로 죽음을 당한 사람은 사형 16인, 자살 1인, 심문 중에 고문으로 죽은 자 1인 등 모두 18인이었다.

송유진의 사후에 그의 집은 역적의 집이라 하여 헐어버리고 못을 만들었다. 그의 가재·전답·잡물 등 재산은 몰수되어 그 고을에서 회계 정리한 후 1594년 (선조27) 6월 13일 계목(啓目)을 작성하여 보고하였는데, 선조의 명으로 발고자(發告者)인 홍응기(洪應沂) 등 15명에게 나누어 주었다.

송유진의 사형으로 분출하는 백성들의 분노를 일단 억눌렀지만 전란 중에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나아가 지방수령들에 의한 연루자 색출과 가혹한 처벌은 백성들의 불만을 내연시키고 있었다. 이것이 결국 2년 뒤에 이몽학의 난으로 다시 폭발하게 되는 것이다.

송유진의 죽음으로 백성을 구제하고 세상을 바꾸려던 그의 꿈은 사라져 버렸지만 그의 꿈이 서린 개현사는 오랫동안 명맥을 이어 나갔다.

1819년(순조19)에 편찬된 ‘신정아주지(新定牙州誌)’를 보면 동심사, 연암사, 용화사는 이미 폐사가 되었지만 개현사는 여전히 연암산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9세기초 만해도 개현사는 여전히 사찰로서 기능하며 살아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11년에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하여 발간된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 ‘아산편’에는 ‘개현사가 일동면(一東面) 월랑리 뒤에 있으며 지금은 여허(餘墟)만 있다’고 하여, 20세기 초에 이르면 개현사도 폐사되어 사라졌음을 알리고 있다.

현재는 개현사의 옛터(음봉면 월랑리 486번지, 월랑리 맹영재 옹의 증언)는 밭으로 남아 있고, 이곳에서 좀 떨어진 연암사 중턱에 1950년대 생긴 개안사(開安寺)라는 사찰이 있어 연암산을 지키고 있다.

↑↑ ▲개현사의 빈자리를 지키는 개안사(開安寺)의 대웅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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