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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궁은 조선 온천문화의 상징"

[특집] 특집, 온천축제 ‘다시 온천이다’

2013년 01월 24일(목) 18:01 [(주)온양신문사]

 

<편집자註> 이 논문은 지난 2010년 10월 5일에 ‘한국 온천문화 전통의 발견과 창조적 계승―온천학(溫泉學) 정립을 위한 역사학적 모색’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제2차 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을 수정한 것이다. 이 논문은 아산지역 온천문화의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해 조선 말기까지 온양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온양행궁의 건립과 그 변천과정을 고찰한 것이다.


조선시대 온양 행궁의 건립과 변천 과정

↑↑ 김일환(아산학연구소 수석연구원)

ⓒ 온양신문

온천욕을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온천요법은 고대부터 동양의학에서 선호하는 질병치료법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온천욕을 이용해 질병을 치유한 역사도 삼국시대부터 존재했다. 후대로 내려와 조선시대에는 국왕과 왕실 뿐 아니라 양반 사대부, 서민에 이르기까지 질병치료를 온천을 찾아 목욕을 하는 것이 빈번했다.

온양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말기까지 국왕을 비롯한 최고 권력자들이 가장 선호하던 온천지로서 세종 이후에는 왕실 가족들이 탕치(湯治)를 목적으로 자주 찾던 최고의 왕실온천이 됐다. 이러한 사실이 독특한 아산지역의 온천문화를 낳은 바탕이 됐다.

온천을 이용한 질병 치유는 그 특성상 국왕이 온천지에 머무는 시간이 길다. 이 기간에도 국왕이 정무를 정지할 수 없으므로 각 부서별로 정부기구가 일시에 지방으로 옮겨왔다. 이 때문에 국왕과 관리들이 온천욕과 정무 활동, 숙식을 할 수 있는 임시 거처로서 행궁을 건축했다.

↑↑ 온양행궁 전도

ⓒ 온양신문

온천에 세워진 행궁을 ‘온궁(溫宮)’이라고 한다. 조선왕조 전시기를 걸쳐 국왕이 계속 방문하고 일관되게 잘 유지된 곳은 온양행궁이 유일하다. 온궁은 국왕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침전(寢殿)과 국왕과 관료들이 국정을 운영하는 정전(政殿), 탕치를 위한 목욕공간인 탕실(湯室)이 기본 축을 형성했다. 이 중에 탕실은 다른 행궁과 달리 온천목욕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온궁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시설이다.

온양행궁의 건립은 조선 초 세종대부터였다. 세종은 자신의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온천행을 결심하고 나서 손수 직접 도면을 보면서 건축을 감독했다. 세종은 민폐에 대한 우려로 인해 작고 소박한 행궁을 건립했다. 행궁의 구조도 국왕 뿐 아니라 병든 사대부와 일반 백성도 함께 이용할 수 있도록 목욕시설을 개조했다.

그런데 세종은 왕실의 온천행은 간헐적이어서 비워두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왕실이 사용하는 일정 공간을 제하면 나머지 공간은 일반 백성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그러나 온궁은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 다시 일본군이 재침한 정유재란 때 서울을 향해 북상하던 일본군이 온양지역을 급습하자 불타고 폐허가 됐다. 이후 180여년간 온궁은 방치됐고 국왕들의 온행도 중단됐다.

온궁이 다시 복구되는 것은 조선후기 현종대이다. 질병 치료를 위해 국왕의 온천행이 재기되자 온양행궁도 복구돼 어실 6칸, 온천 방 6칸을 비롯한 약 100 여 칸 규모로 신축됐다.

이후 숙종, 영조, 장헌세자까지 국왕과 왕세자의 온양온천행은 활발하게 이루어져 아산 지역에 독특한 온천 문화를 형성했다. 장헌세자의 온행 이후 국왕과 왕실 가족의 온행은 다시 중단됐다. 하지만 정조가 부친인 장헌세자의 추억의 장소인 온궁에 영괴대를 설치하고 영괴대비를 세우는 등 각별한 관심을 두어 관리했다.

이후 온궁은 많이 퇴락했지만 19세기 전반기까지는 외형이 완전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고종 때 이르러 정무를 보던 정전이 없어지고 새로운 건물인 함락당과 혜파정이 신축됐다. 이것은 대원군이 사용하던 온천별장이었다. 그러나 1904년부터 일인들에 의해 온궁이 침탈되면서 일인들의 손에 넘어가고 온궁터에 신정관이 지어지면서 온궁은 자취를 감추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온궁은 조선시대 온천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이며 온양온천이 왕실 온천이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온궁의 역사를 통해 한국 온천문화의 역사적 실체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역사적 측면에서 이루어진 온양온천에 대한 연구는 미미한 수준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서야 ‘온궁육백년’(2000), ‘온양행궁 학술조사 및 복원 기본계획’(2001), ‘온양온천의 역사적 사실 재조명’(2009) 등의 연구성과가 나타났다.

이 연구는 온양온천에 관한 역사적 사실을 생생하게 정리해잘 보여주지만 모두 기초적인 자료 정리 단계에 머물러 있다. 한편 최근에 와서 국왕의 행행(行幸)이라는 관점에서 온행을 정리한 연구와 조선시대 행궁 전반을 설명하는 가운데 온궁을 언급한 성과 등이 점차 나타나 온궁의 실상을 이해하는데 일정한 도움을 주고 있다.

본 논문은 아산 온천문화의 실상을 체계적으로 연구하여 그 역사적 의미를 규명하기 위한 목적에서 연구됐다. 이를 위해 우선 주목한 연구 대상이 조선 말기까지 온양에만 유일하게 남아있던 온궁이다. 온궁은 온양온천이 왕실온천이었음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며 조선시대 온천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조선시대 온양행궁에 관한 자료는 다른 지역의 온천에 비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어 사실의 규명이 용이한 점도 연구가 가능하게 하는 요소이다.

본 논문은 조선초기 온양행궁이 건립되는 과정과 함께, 조선시대를 일관하여 시간적 흐름에 따라 온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등을 추적해 정리하고, 그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도 밝힌다.

<다음호에 계속>

온양신문사 기자  ion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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