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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형열의 [행복한 아산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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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온양신문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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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06월 11일(월) 13:44 [(주)온양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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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의 현대 인물을 찾아서, 소고 이항녕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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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형열(순천향대 강사) | ⓒ 온양신문 | 순천향대 학생들에게 우리 근현대사를 주로 가르치면서 아산과 맺은 인연이 어찌하다보니 아산의 근현대사에 대한 공부로까지 나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아산에서 나고 자란 또는 활동한 여러 인물을 조사하는 기회도 갖게 되었다.
역사라는 게 크게 보자면 사회경제적 구조의 변동에 따라 움직이지만 우리가 피부로 느끼기에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사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아산의 산업구조가 어땠느니 하는 것보다야 우리 고장엔 어떤 분들이 계셨나 궁금해 하는 게 일반적이다.
개항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근대사에 집중해서 본다면, 독립운동으로 공훈을 받은 분이 40여 명에 이른다. 그만큼 존경할 만한 인물이 많다는 의미가 될 게다. 그런데 해방 이후 현대사 쪽에서 찾아보면, 윤보선 대통령 같이 널리 알려진 분도 있지만 아산을 대표할 만한 명망가가 그다지 많지 않다. 사람이 없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발굴, 탐구, 교육이 충분치 못했던 탓이다.
이러한 취지에서 아산 출신 법학자이자 문학가였던 소고(小皐) 이항녕(李恒寧, 1915~2004) 선생을 소개할까 한다. 이항녕은 둔포면 둔포리에서 아버지 이병민, 어머니 정병진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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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온양신문 | 그가 남긴 회고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한학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 손자를 신식학교에 보내는 걸 반대하셨는데, 부친이 둔포공립보통학교의 훈도로 있으면서 그를 이 학교에서 공부시켰다고 한다. 교육열이 강한 부친 때문에 6학년 때 온 집안이 경성으로 이주했고, 그는 경성 창신보통학교를 거쳐 제이고등보통학교,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했다.
이항녕은 많은 동창생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고등문관시험을 준비했다. 물론 당시에도 민족의식이 투철한 저항적 학생들이 있었지만, 집안 형편이 넉넉지 못한 그는 체제 순응형이었다. 그는 졸업을 앞둔 1939년 시험에 합격했고, 해방 전까지 하동군수, 창녕군수를 지냈다.
1945년 8·15해방. 이항녕은 일제 말 강제공출, 징용, 징병에 앞장선 친일 전력을 부끄러워했고 민족 앞에 속죄하길 원했다. 그는 염치를 아는 사람이었다. 미군정 하의 미군 도지사는 그가 계속해서 행정사무를 맡아주길 원했다.
그러나 그는 국민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며, 자신도 새로 태어나고자 했다. 이후 그는 중학교, 농업고등학교 교장을 맡으며 교육에 힘썼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이항녕은 중등학교에만 있기 아까운 사람’이라면서 대학으로 끌었고, 동아대, 부산대, 성균관대를 거쳐 1954년 고려대 법대교수로 부임했다.
1960년 4·19혁명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지던 때, 이항녕은 ‘학생들의 피에 보답하라’는 교수단 시위에 참여했다. 그것은 군경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학생과 시민에 대한 염치,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때문이었다. 그는 같은 해 5월부터 8월까지 문교부 차관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또한 이 시기 <청산곡>이라는 자전적 소설을 써 친일을 공개적으로 참회했다.
다음 해 5·16군사쿠데타가 발발하고 박정희정부가 수립되었다. 군사정부는 체제 안정과 경제발전을 위해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추진했고 이는 대규모 학생시위를 유발했다. 1964년 6·3운동이 그것이다. 이항녕은 이 무렵 ‘5·16은 4·19에 대한 반역이고 한일협정은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라고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로 인해 그는 1965년 9월부터 1년 6개월간 교수직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72년 홍익대 총장으로 취임해 1980년 퇴임했다. 이 시기에도 그는 수많은 일화를 남겼다. 이 중 신문에 기고한 다음 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나는 한 끼의 점심값으로 수천원을 쓰고도 하루 종일 뼈아프도록 일하고 겨우 천원도 못 되는 삯을 받는 청소부 아주머니를 동정해 본 일이 없습니다. 이런 내가 무슨 지도층에 속한단 말입니까?”
민족사회 앞에 과거 자신의 친일을 시인·반성한 것, 민주주의와 민족주체성 확립을 내건 4·19혁명과 6·3운동을 지지한 것, 그리고 사회지도층으로서 힘들게 하루하루를 사는 이들에게 따스한 시선을 보낸 것 등은 그가 자신의 사회적 책무, 도덕적 책임을 깊이 깨닫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항녕은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우리 사회의 도덕적 가치를 바로 세우기 위한 각종 단체에 참여하는 한편 문필 활동도 계속했다. 만년에는 나고 자란 고향땅에 대한 그리움으로 아산의 산천에 대한 애정이 담뿍 담긴 시조 몇 수를 남기기도 했다.
아산에서 태어나 아산을 마음에 품고 세상을 떴으니, 그의 한 평생은 아산을 떠나서 결코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그가 쓴 시조 한 편을 감상하며, 이항녕에 대한 소개를 마치고자 한다.
둔포에서
높은 산도 있지 않고 넓은 강도 아니지만
언덕은 아름답고 맑은 물은 시원하다
옛날은 이곳까지 배가 드나들었다
철도부설 둘러싸고 평택에 뒤졌지만
교육열 대단해서 일찍이 학교섰다
어려서 배우던 집은 고목들이 무성타
여기서 내가 나고 여기서 내가 컸다
살던 집은 허물어져 자취도 희미한데
탐스런 무궁화꽃은 온 둔포에 피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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