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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의 [행복한 아산만들기]

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온양신문사 공동기획

2011년 09월 28일(수) 13:21 [(주)온양신문사]

 

도고면 오암리에서 자란 세종의 후궁 상침 송씨

↑↑ 김일환 / 아산학연구소 대우교수

ⓒ 온양신문

아산시 도고면 오암리에 가면 야트막한 언덕 위에 오래된 무덤이 하나가 있다. 봉분도 주저앉고 비석에는 이끼가 끼어있어 언뜻 보면 무덤의 주인을 알기가 어렵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앞면에 ‘상침송씨지묘(尙寢宋氏之墓)’라는 묘지명이 있고, 뒷면에는 주인의 생애를 기록한 비문이 새겨져 있다.

이 무덤의 주인은 바로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후궁인 상침 송씨이다. ‘상침’이란 명칭은 그녀가 궁궐에서 국왕과 왕실가족을 보필하던 궁녀였음을 말해준다.

↑↑ ▲도고면 오암리에 있는 상침송씨의 무덤

ⓒ 온양신문

그녀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비문 외에 전무한 형편이다. 비문을 살펴보면 그녀는 1463년(세조9) 68세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역산하면 송씨는 1395년(태조4)에 출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세종이 1397년생이니, 그녀는 세종보다 2년 연상이었다.

상침 송씨가 아산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도고면 오암리에는 그녀의 출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해 오고 있다.

옛날 도고면 오리실 윗말에는 송씨 성을 가진 분이 살고 있었다. 어느 해 송악면 강장리(지래)로 가는 길목 산자락 밭에 목화를 심었는데 목화가 환하게 피어서 송씨댁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목화를 따는데 목화밭머리 언덕에 어떤 노승이 누워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시어머니가 가서 보니 굶주려 기운을 못 차리는 것 같은지라, 며느리에게 먹을 것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며느리가 집에 가보니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어 언뜻 생각난 것이 자기의 젖(乳)이 불어 있어 한통은 애기에게 줄 예정을 하고 한통을 대접에 짜서 가져다주었다.

그 젖을 먹고 난 스님이 ‘후유’하고 긴 숨을 내쉬며 ‘이제 살 것 같군, 이것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다. 시어머니가 ‘죄가 된다면 용서하시오. 급한 마음에 며느리가 제 젖을 짜온 것입니다’하니 ‘이런 고마울 데가 어디 있습니까? 이 은공을 어떻게 갚습니까?’ 하더니 그 앞산을 가리키며 ‘저 곳에 산소를 쓰시오. 그러면 왕비가 나올 것입니다’하고 스님은 어디론가 가벼렸다고 한다. 그 후 그곳에 묘를 썼더니 그때 젖을 짜준 며느리의 딸이 후일 세종대왕의 상침이 되었다.

↑↑ ▲상침송씨의 묘비명 탁본(온양문화원 소장)

ⓒ 온양신문

위 구전설화가 사실이라면 상침 송씨는 오암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것으로 보인다. 비문을 보면 그녀는 비록 출신은 낮았지만 미모가 출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녀가 언제, 어떻게 궁녀로 선발되어 입궁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태종실록’을 보면 정부가 수차례 충청도에서 처녀를 징발하여 궁녀로 들인 적이 있었다. 이 무렵 송씨도 궁궐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태종대부터 궁녀생활을 시작하여 세종대에는 상침에 올랐다. 상침은 상궁, 상의, 상복, 상식, 상공과 함께 내명부 5품의 궁관직인 육상(六尙)의 하나로 연현(燕見)과 진어(進御)의 차서(次序)에 관한 일을 맡았던 최상위의 궁녀직이었다.

이것이 인연이 되었던지 송씨는 어느 날 세종의 승은을 입게 되었고 1425년(세종7)에 딸을 낳았는데, 이 아기가 정현옹주이다. 이때 송씨의 나이가 30세로 당시로 보아서는 늦은 나이에 출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통상 국왕의 승은을 입고 왕의 자녀를 생산하면 후궁의 첩지를 받아 궁녀직을 면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그녀는 후궁의 첩지를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기록이 없어 자세히 알 수가 없지만 신분이나 가문이 보잘 것 없는 것이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녀는 끝까지 궁녀신분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하지만 송씨의 딸인 정현옹주는 최고의 명문가인 파평윤씨 가문의 윤사로에게 시집을 갔다. 윤사로가 1436년(세종18)에 영천군으로 봉해짐을 보아 이때 부마가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정현옹주는 12살이었다. 이 혼인은 세종이 주선한 것으로 보인다.

윤사로도 비록 국왕의 서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였지만 부마가 됨으로 세종의 총애를 극진히 받았다. 나중에 윤사로는 처남인 세조의 왕위찬탈에 협조하여 좌익공신이 되었다. 그 덕분에 경제적으로 막대한 부를 모아 당대 최고의 부자 중에 한 명이 되었고, 세조의 총신이며 정치실력자인 한명회의 딸을 며느리로 삼을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정현옹주와 결혼은 그에게도 큰 행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1449년 세종이 사망할 때 송씨는 55세였다. 세종 사후에 송씨는 세종의 유명(遺命)을 따라 궁궐을 나가 정현옹주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녀는 이곳에서 종신토록 살았는데 1463년(세조9)에 천식으로 68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이듬해 송씨의 무덤은 도고면 오암리에 만들어졌다.

송씨가 사망한 6년 후인 1469년(예종1)에 그녀의 딸인 정현옹주는 온양온천에 목욕을 하러 한번 왔다. 이것은 아마 생모의 무덤을 찾아 성묘하기 위한 명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상침 송씨의 무덤은 1758년(영조34)에 간행된 ‘신창현읍지’ ‘총묘’조에 올라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아산은 온양온천 때문에 세종과 인연이 깊은 고장이다. 그런데 아산은 세종의 후궁이던 상침 송씨의 고향이며, 그녀의 유혼이 잠들고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인연이 깊이 닿아 있는 고장인 것이다.

온양신문사 기자  ion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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