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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가보는 천경석의 향토문화 기행 용화가 미륵불을 찾아
우리고장에도 참 낳은 절터가 있다는 사실은 이미 언급하였었따.
지금은 거의 흔적 조차찾을수 없는 경우도 있고, 밭이나 논 또는 황무지 상태로 어느 정도 남아 있어서 쉽게 알아볼수 있기도 하다. 그래서 새로 절을 짓거나 할때 그 인연을 찾아 옛절터에 자리잡는 경우도 많다.
오늘 찾아가 볼 송악 외암2구 윗산막골의 용화사도 옛절터에 새로 절집을 세운 경우가 된다.
온양에서 송악으로 가다가 다리를 건넌뒤 데이콤 진입로 바로 다음에서 설화산쪽으로 들거가면 윗산막골이다.
마을로 들어서면 두 갈래길이 나오는데 왼쪽으로 죽 따라 마을을 가로질러들어가면 맨 끝에 태고종 계열의 용화사가 있다.
절을 창건한 1947년 해방 직후시기만 해도완전히 폐허로서 잡목과 가시덤불이 우거진 곳이었다고 한다.
송악 평촌리 분으로서 그 전에 10년 동안 인근 송악사에서 공부를 하던 고○○스님이 독립(?)하여, 미륵불이 있는 이곳에 사재를 털어 절을 세웠다고 한다.
설화산의 서쪽 산허리에서 서향으로 자리를 잡았다.
그분은 3년전에 돌아가시고 지금은 고법성 스님이 주지이다.
현재 석가여래 삼존불(석가모니불, 관세음보살, 대세지보살)과 한쪽 옆에 지장보살을 모신 대웅전, 산실, 칠성 , 독성님을 보신 삼성각, 7년전에 조성한 범종과 종각, 벽돌 건물이 요사채(살림집)등이있고 뜰 한가운데에 동남향을 바라보고 있는 석조여래입상(돌로만든 부쳐님의 서있는 모습)이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을것으로 추정되는 이불상은 원래는 석가여래불인데 보통 "미륵불"이라고 하니 이글에서는 그냥 미륵으로 부른다. 1947년 절터를 닦을때 비금보다 30~40cm정도가 흑에 붇혀 있었던 것을 그 만큼 파낸 것이로 그 아래 부분을 손을 대지 않앗으며 주변에 자연석으로 둘러놓기만 했다고 한다.
전체가 하나의 화강석으로 되어 있고 전체적으로 우람한 느낌을 준다.
위에서부터 살펴보면 육계(머리위에 두툼하게 솟아나게 표현된 부분)가 비교적 크고 귀가길게 늘어져 있어서 후덕하고도 경지 높은 부처님을 표현하고자했던것 같다.
눈은 좀 작은 편이고 코가 뭉툭하며 입은 세밀하게 조각되어 있으나 얼굴 크기에 비해 작은 펴이며 구시부리와 목 사이가 떨어져 있지 않아서 힘이 있어 보이는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다.
보통의 불상이나 보살상과 달리 어깨 부분을 각이 없이두그스름하게 처리하여 시각적으로 어깨나 팔이좀 처지고 목이 길어 보이기도 하지만 또 달리 보통 통견으로 어깨 양쪽에 선이 굴게 처리된 옷주름과 어울려 우람하고 당당하 느낌을 주게 된다.
수인은 "시무외 여원인"이라 하여 왼손은 가슴 앞에서 젖혀 손바닥을 보이게 하고 오른손 역시 가슴앞에서들어 손바닥을 보이게 하고 있다.
대부분의 옷주름이 굵게 표현되어 있고 아래로 내려 오면서 바깥으로 약간 벌어지고 있다.
사람으로 치면 엉덩이 아래까지만 보이고 다리 부분은 흙속에 붇혀 이는 상태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보습을 볼수 없음이 아쉽다.
오랜 세월을 말해주듯 불상 전체적으로 얼룩덜욱하게 바위옷이 끼어서 얼핏 보아서는 얼굴 표정이나 손 모습, 옷의 매듭등이 자세하게 보이지 않는다
특히 불상, 그증에서도 얼구을 보면 느끼게되는 자비로운 미소나 온화함, 또는 근염한 모습등 그 어떤 것을 느끼기 어려운 것이 가장 아쉽다.
또 한가지, 지금은 절을 지을 당시에 많은 기와 조각들과 "둥그런 것과 네모난"석재 들이 있엇는데 모두 파헤쳐서 땅 속에 붇히게 되었다고 하니 참 아쉬운 일이다. 그런 것들을 통해 원래 있던 절에 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볼수 있을 텐데...
현재 두 그루의 아름드리 팽나무가 불상 좌우에서 시종하듯서 있고, 해질녁의 주변은 고요하다.
살펴보고 내려올때 범종이울린다. 우리지역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일이다. <아산향도쿤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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