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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석의 향토문화 기행 인주면 해암리 한절골 미륵님(1)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정복하고 나서 정복당한 나라의 문화를 파괴하는 일이 참 많았고, 어느 왕조가 새로 등장하면 그 이전 와조와 관련된 여러가지를 철저히 없애버리는 일이 잦았다.
그런 파괴와 살육으로 인해 엄청난 문화재 훼손과 문화적 변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그와 비슷한 상황이 또 있다. 조선시대에 들어 성리학을 기반으로 하는 사대부들이 지배세력으로 자리를 잡고 나서 불교에 대한 억압이 극심했는데, 재미있는 일은 성리학이 불교 선종의 영향을 받아 성립된 새로운 학풍의 유학이었지만, 오히려 불교에 대배 피박과 억압이 극신했다는 점이다.
어쨌든 국가적인 불교 억압과 더불어 전국 각지에서 명문거족의 양반 집안으로 인해 불교 사찰이 수난을 겪는 일이 상당히 많았고 우리 아산에서도 그런 예를 찾아볼 수 있으니, 이번 살펴보게 될 인주 한절골 미륵님도 아픈 사연을 안고 있다.
자칫하면 그 집안 분들로부터 야단을 맞을 얘기가 될 수도 있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그냥 언급하기로 한다.
온양에서 염티 소재지를 거쳐 곡교천을 딸 약 10km쯤 가면 왼쪽으로 주유소가 있고 건녀편에 아파트 건설공사가 한창인곳이 나온다.
거기에서 낮은 고개를 올라서면 왼쪽에 선돌처럼 '대윤사'안내비가 서 있고 그곳부터 다음 고개까지가 이번에 다닐 한절골 마을이다. 한절공은 행정구역상 인주면 해암리3구이고, 한자골이라고도 하는데 음이 변형된 것이며, 한자로는 대사동이라고도 한다.
모두 큰절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다.
이런 곳에 남양 홍시 일가가 이주하면서 스님들을 몰아내고 절을 없앤 뒤에 세거촌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처음이곳에 온 사람은 장예원 판결사를 지낸 홍우기로서 보통 '판결사공'이라고 한다. 전에 살펴봤던 선조 대의 청난공신 만전 홍가신선생의 손자이니, 한절골로 이주한 것은 17세기초의 일이 될 것이다.
지금으로 부터는 대략 350여년 전 쯤의 일이다.
지금 이 마을에서 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거의 없다. 마을 이름과 구전, 그리고 지금은 대유사에 가 있는 미륵님, 그리고는 논밭에서 나오는 기와조각들 뿐, 최근에 밭을 논으로 만들다가 찾아냈다고 하는 비석이 있지만 글씨는 하나도 보이지 않을만큼 마모되어 정확히 절과 관련된 것이었는지 알 수 없다.
그대신 마을 가장안쪽 , 절건물들이 있었을 자리근처에는 판결사공등 남양홍씨 일가의 위패를 모신 제각이 있다. 여기저기에 있는 산소를 일일이 다니기 어려워서 4년전에 세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마을 동쪽 낮은 봉우리 자락에는 깔끔하게 다듬어진 '열녀 정려'가 있다. 바로 이 마을 남양 홍씨의 중시조 격인 판결사공 홍우가 선생의 처 여흥 민씨의 열녀문이다.
병자호란으로 우리나라가 청나라 군대에 유린당한 일이 있을때, 그 청병들이 우리 아산지여까지 쳐들어와서 피난을 가게되었는데, 그때 못된 청병이 당시 숙부인 민씨의 젖가슴을 만지자 부인이 젓가슴을 도려내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이 사실 후에 조정데 알려지고 열녀로 추천하게 되어 '정부인'으로 올리고 열녀문을 하사하게 되었다고 한다.(열녀 민씨에 대해서는 '신정아주지'등에 기록이 전해진다)
17세기 호란 당시 주전론과 주화론의 갈등이 심했었는데, 늘 가슴 한쪽을 답답하게 한 일은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한다"고 했던 높은(?) 사람들 중에서 국왕이 무릎 끊고 항복을 했던 치욕을 당하고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고관대작은 없었다는 사실이었다.
명분론을 내세운 이들에 의해 전쟁이 야기되었고, 전쟁이 지속되었고 병졸들이 목숨을 잃고 애꿎은 백성들만 고초를 겪고 목숨을 잃었었다. <아산향토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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