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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석의 향토 문화기행 영인 신현리 미륵불
우리고장에 이러저러한 문화재나 문화유적이 많은데, 그중에서 하층 민중의 애틋하면서도 꿋꿋한 삶을 엿볼수 있는 것으로 신현리 미륵불이 있다.
물론 몇군데의 장승도 있지만 장승들에서는 느낄수 있는 것과는 또다른 맛이다.
영인 소재지에서 저수지를 지나 인주 공세리 쪽으로 약 3km쯤 가면 월선리가 나오고, 이곳 배다리에서 월선리로 접어들어 들판을 구불구불 돌아가는 길을 따라 가면 신현리 배내 마을을 지나게 된다.
저 앞쪽에 영인산 서북자락을 긁어먹는 채석장이 보일만한 곳에 몇 채의 집이 있고 그 뒤에 영인산과 입암산 자락이 만나며 이루어 놓은 낮은 산기슭에 도지정 문화재자료 제 234호인 “신현리 미륵불”이 있다.
이곳이 인주 냉정리로 넘어가는 ‘수루넘어(수루넘이, 수루너미)’일텐데, 지금은 고개길에 해당되는 곳에 길은 보이지 않고 천수답 다락논이 차례대로 있고, 미륵불은 그 한쪽 옆에 자리잡고 있다.
절터라는 것을 말해주는 기와 조각들이 주변에 흩어져 있고 미륵불 둘레는 시멘트로 다듬어져 있다.
전체 높이 260cm로, 불상은 두께 25cm의 화강함 판석을 이용해서 조각되어 있다.
돌판의 한 면에 새겼으니 돋을 새김의 정도는 약하고 또 풍화작용으로 어느정도 마모되어 있기는 하지만 불심과 소망을 담아 공을들여 다듬었음이 역력하고, 지금도 여전히 선이 굵고 시원시원하며 특히 눈이 크고 얼굴이 살진 모습이어서 보는 마음도 편안하고 넉넉해진다.
오랜 세월동안 머물며 또 때로는 스쳐가며 바라보았을 옛 사람들도 그러했으리라.
미륵보살은 석가모니로부터 미래에 부처가 되리라는 약속을 받고 현재도 솔천에서 설법하고 있으며 석가모니불 이후에 다시 이세상에 내려와 용화수 아래에서 성불하고 미륵불이 되어 석가모니가 구원하지 못한 나머지 모든 중생을 구제한다는 보살이다.
미륵신앙은, 현세에서 공덕을 쌓아 미륵보살이 머무는 도솔천에 태어나기를 기원하는 ‘미륵상생신앙’과 미륵보살이 이땅에 와서 중생을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미륵하생신앙’의 두가지로 구분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미륵하생신앙이 더 유행하였던바, 이러한 미륵신앙은 삼국시대부터 발달하였으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쳐 하층 민중들 속으로 내면화 되어 널리 퍼지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면면히 이어져 왔다.
그 만큼 살기 어렵고 고통이 많았다는 얘기가 된다.
미륵신앙은 사회가 불안정하고 민초들이 고통스러운 시기에 특히 더 융성하였음을 역사는 말해준다.
유명하고 커다란 사찰에 잘 만들어진 미륵보살이나 미륵불상이 많이 있기는 하지만, 시일이 지나고 미륵신앙이 널리 퍼진 이후 민중들은 그것들과는 또다른 나름대로의 미륵을 조성하게 된다.
미륵하생신앙은 현세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새로운 세상이 오기를 갈망하는 민중들의 변혁 욕구와 맞물려 하루 빨리 미륵보살의 출현하여 구원해주기를 바라는 집단 구제 신앙으로 나타나게 되었고 민중들 자신의 성향과 요구에 따라 그들 민주의 투박한 솜씨로 전국 각지에 미륵불들이 세워지게 된다.
천불천탑으로 유명한 운주사의 미륵들 처럼,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으며 자신들 나름의 미륵을 창조해 낸다.
그래서 미륵골, 미륵댕이 등이 남아있는 미륵상들은 그 숫자만큼이나 모습도 가지가지 사연도 가지가지이다.
우리 아산지방에도 몇군데에 미륵상이 남아있다. 영인에서 아산만 방조제로 이어지는 39번 국도 언저리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던 시기에는 인주로 연결되는 주요 통로였을 것으로 생각되는 이곳에도 그런 마음이 담긴 미륵불이 세워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신현리 미륵불은 정확히 언제 세워졌는지 알 수 없으나 고려시대일 것으로 추정한다.
어느분은 조선시대라고 하지만 광배(부처님 뒤에 후광이 비치는 것을 표현해 놓고, 불꽃이나 연꽃 등으로 꾸민 부분. 귀와 목뒤 부분, 모자 바로 밑 등에 흔적이 남아있다.)와 육계(불상의 머리위에 살상투를 표현한것-모자 밑을 보면)등으로 보아 시대가 좀더 올라가야 할것 같고, 다만 갓모양의 모자는 훨씬 후대에 광배가 대부분 훼손된 뒤에 올려놓은 것이다.
이마 부분에 백호를 두었던 구멍이 있고, 오른손으로 염주를 감아쥔 표현이 재미있다.
복스럽게 둥글 넓적한 얼굴과 커다란 눈망울에서 모든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할 존재로서의 절대자적인 강인함과 근엄함은 도대체 느낄수 없다.
두꺼운 외투를 벗기는 것은 복풍이 아니라 따스한 햇볕이었듯이.
하층민들을 구원하는 존재는 바로 그 민중들의 모습 그대로일 수 밖에 없었으리라.
이제 누가 구원해주기를 기다리기만 할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함을 자각하였을 터이니. <향토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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