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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석의 향토 문화기행 척화비
신창초등학교 앞의 김육 대동비에 이어 이번에는 입구 도로 옆에 있는 척화비를 살펴보자.
너무나 잘 알려진 바대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서양 제국주의 침략 세력에 맞서며 그 의지를 표현하기 위해 전국 가지에 세운 것이다.
1800년대에 들어 우리나라 바닷가에 이양선(서양배를 ‘이상한 모양의 배’라 해서 그렇게 불렀다.)이 자주 출몰했다.
중국의 청은 ‘종이 호랑이’로 전락해서 영국에 무릎을 꿇었고 일본도 미국의 위협에 굴복하였으니 조선이 마지막 먹이라도 되는양 제국주의 열강이 눈독을 들이던 시기였다.
60여년간의 세도정치로 인해 극도로 약화된 왕권을 재확립하고자 했던 흥선대원군에게 외세의 침략은 커다란 장애와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고 천주교를 이용해 프랑스를 끌어들여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했던 계획도 여의치 않아 마침내 자주의 기치를 내걸고 통상 요구를 거절하며 침략에 맞서게 된 것이다.
전에는 이러한 입장을 “쇄국정책”이라 했었지만 최근에는 ‘통상 ․ 수교거부’정책이라고 한다.
그리고 전에는 흥선대원군의 내외정책을 다소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으나 근래에 들어와서 그 한계성으로 인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예를 들어 그는 여전히 화이관(중국 중심의 사고방식)에 머물며 청과는 일정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청은 청대로 조선을 자신들의 ‘속국’이라 하며 종주권을 행사하고자 했다.
또한 그 통상 ․ 수교 거부 정책의 근본 목적이 민족적 이익보다는 화이론적 세계관과 위정척사의 입장에서 국왕 중심의 봉건적 지배체제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안으로 보아서도 하층민중이 성장하며 역사의 전면에 나서게 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던 시대적 상황에서 봉건적 전제왕권 강화는 역사발전 방향을 거스르는 복고적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통상 ․ 수교거부 정책은 제국주의 외세의 침략이 본격화된 이래 외세와의 관계에서 “반외세”라는 기본 입장을 견지하는 출발점이 되었고 민중들의 반외세 투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중시하지 않을 수 없다.
비석 앞면의 오른쪽부터 큰 글씨로 양이침범【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卽和主和賣國), 그리고 그 옆에 작은 글씨로 계아만년자손(戒我萬年자손)】이라 새기고 ‘병인작 신미입(丙寅作 辛味立)’이라 하였으니 잘아는 바와같이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면 싸우지 않은 것은 곧 화친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 자손만대에 알리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는 내용이다.
병인년(1866)은 천주교도 처형을 구실로 강화도 일대에 침범했던 프랑스를 격퇴한 병인양요가 있었고 신미년(1871)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 평양에서 행패를 부린 미국배를 불태운 1866년의 사건을 구실로 통상을 요구하며 역시 강화도 일대를 침범한 미국을 물리친 신미양요가 일어났던 해이니, 흥선대원군이 척화비를 세우도록 한것은 두 사건을 계기로 승리감과 자신감을 얻은 결과였다.
1882년 임오군란을 무력 진압한 청에 의해 흥선대원군이 납치되자 일본 공사의 요구로 척화비를 모두 철거하였으니 지금 남아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
신창초등학교 입구의 척화비는 옛동헌 근처에 방치된 것을 학교 안으로 옮겼다가 10년전에 지금의 위치로 다시 옮겨놓은 것이다.
네모난 받침돌에 25cm 두께의 네모난 비로 높이 147cm의 아담한 화강석 비석이다.
지붕돌은 없고 다른곳에 세워진 척화비들도 대개 규모나 모양이 비슷했다고 한다.
홍성에도 척화비가 남아있다고 한다.
이 비석을 1년여쯤 전에 누군가가 먹물로 새까맣게 칠해버렸는데, 탁본을 하기 위한것은 아니었던 것 같고 그 사유는 알 수 없으되, 어느정도 지워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보기에 민망하다.
보물급의 중요한 문화재는 아닐지언정, 어쨌든 우리역사와 문화를 말해주는 것은 모두 똑같은 것인데 볼때마다 몹시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흔히들 문화재 관리 상태를 말할 때 ‘행정당국의 관리 소홀’만을 꼬집기 일쑤인데 사실 알고 보면 행정당국의 손길이라는 것도 한계가 있는것 은 뻔한 일이니, 모든 주민들이 관심과 애정을 갖고 돌보는 것이 우선이다.
그나마 요즘에 ‘학생봉사활동’이라는 것이 생겨서 가까운 곳에 있는 문화재나마 청소라도 했지 전에는 문화재 주변을 청소하는 경우는 극소수에 불과했던 것이 사실이다.
다만 욕심을 좀 내자면 ‘교육과 문화창달’을 표방하고 있는 우리 아산시 당국도 지금보다 조금만 더 예산과 인원을 배정하도록 노력해야 할것이다.
건설은 조금 늦어져도 되지만, 문화재는 한번 훼손되면 영원히 다시 되살릴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아산향토문화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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