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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석의 향토 문화기행 김육의 공덕비를 찾아서
얼마전에 이승우라는 반민족인 인물의 청덕비에 대해 살펴 보았는데, 이번에는 또 다른 한사람의 비석을 찾아가 본다.
조선시대의 한 인물인 김육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이다.
온양에서 순천향 대학쪽으로 가다가 조금 못가서 오른쪽 샛길로 들어가거나 순천향대 입구 사거리에서 우회전해서 몇백미터만 가면 신창초등학교를 쉽게 찾아갈 수 있다.
이 일대가 신창면 읍내리로, 조선시대 신창현의 중심지였다.
동헌은 조금 떨어진 옆에 있었고 학교 뒤에는 가운데에 ‘相國金公堉永世不忘裨(상국김공육영세불망비)’라 새겨져 있고 양옆에 작은 글씨로 ‘創設大同’ ‘省?便民(성?편민)’라 씌어 있으며 뒷면에는 順治十七年疦子五月日立‘이라고 적고 있다. 《이중에 ‘省?便民(성?편민)’은 “(대동법을 실시해서)어려움을 또는 좋은 길을 살피어 백성들을 편하게 했다”고 풀어서 생각 할수 있는데 두 번째 글자를 잘 알 수가 없다.
1983년에 편찬된 「아산 군지」에서는 經으로 보고, 「아산의 문화유적」(1993)으로 보았는데 타당해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徑과 같은자)으로 보는 것이 어떨까 한다》
김육(1580~1658, 호는 잠곡(潛谷)은 서울태생으로 봉당으로는 서인 계열이었으며, 특히 대동법 실시, 화폐유통, 수레와 수차의 이용, 시헌력(時憲歷) 채택 추진등 경제정책 분야에서 실학의 선구자로 평가되는 탁월한 식견과 능력을 발휘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서인이 주도한 인조 반정 이후 본격적으로 관직에 나아갔고 네차례나 명과 청을 다녀오면서 시야를 넓히기도 했다.
그가 충청도 감사9관찰사, 현 도지사)로 재직할 당시(1638년)에 대동법 실시를 주청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영의정이 된 1651년에 충청도에 대동법을 시행토록 하였다.
재미있는 것은 이당시 충남 논산을 근거지로 하고 상당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김집(金潗, 사계 김장생의 아들로 호는 신독재)과 대동법 실시 문제를 놓고 논쟁을 하게 되었는데, 이지역 사람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서울 사람은 끝까지 실시를 추진했다는 것이다.
대동법은 집집마다 공물을 현물로 내어 백성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던 공납 제도를 고쳐서 땅에 세금을 부과하고 쌀 등으로 내게 하는 것이었다.
이는 농민의 불만 무마와 국가재정확보를 위한 것으로 당시에 땅을 갖지 못한 백성들이 대부분이었던 상황에서 부담이 상당히 덜어지게 된 제도였다.
그러니 김집과 같이 향촌에 토지를 많이 가지고 있던 양반들의 반대가 극심해서 도 단위로 따로따로 실시되어 1608년 경기도에서 시작한 이래 황해도에 1708년에 적용하여 완성되기까지 어려움이 많았던 일이었다.
그러니 백성들편에서는 당연히 환영할 일이었다.
김육의 비는 예산 대흥면(조선시대 대흥현)에도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이곳 신창에만 세워진 것은 아닌 모양이다.
이비는 그가 죽고 난 뒤(1660년)에 세워진 것으로 뒷면에 세운 해를 적어놓았는데 대개 격식을 갖추었다고 하는 비석들이 조선후기에 세워졌더라도 청의연호를 거부하고 예를 들어 ‘숭정기원후○○년 □□’하는 식으로 이미 망해버린 명의 연호를 사용하는 것에 비해 청세조의 연호인 順治(순치)를 사용해서 기록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원래는 동헌터 앞에 있던 것을 1980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 놓았다고 한다.
신창초등학교 주변은 조선시대 지방의 모습을 이해하기에 참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제 천천히 이 일대를 함께 살펴보기로 한다. <아산향토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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