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경석의 향토문화기행 배방산성
여러차례 확인하였듯이 우리 아산지방에는 산성이 굉장히 많다. 오늘은 그중에서 배방산성을 찾아가본다.
온양에서 송악쪽으로 가다가 구온양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모산쪽으로 약 2km 가면 크라운제과 못미쳐서 오른쪽으로 신흥리 들어가는 길이 있다.
요 근래에 새로 포장을 해서 길도 깨끗하다.
800m쯤 가서 첫 마을이 감태기(감택)마을인데, 이 마을 동쪽 산이 250m 높이의 성재산이고 이 산의 꼭대기 부분에 배방산성이 있다.
마을로 들어가면 안내 표지판과 설명판이 잘 만들어져 서 있다.
배방산은 남쪽 1.5km 지점에 있고, 성재산은 배방산 줄기의 북쪽 맨 끝 봉우리이다. 배방산성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옛날 (백제 개로왕 원년, 서기 455년)에 한노파가 성배(成排 ․ 여)와 성방(成芳 ․ 남)이라는 쌍둥이 남매와 함께 살았는데, 모두 힘과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늘 다투기 때문에 둘중 하나를 없애기 위해 내기를 시켰다.
배는 돌로 성을 쌓고, 방은 80근 쇠신을 신고 서울에 가서 검은 황소와 500근 쇠솥을 구해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한달 기한을 주었는데 배가 성을 거의 완성해 가자 방을 아끼는 마음으로 콩을 볶아 배에게 주니 배탈이 나게 되어 방이 이기게 되고 배는 화가나서 성쌓던 돌을 하늘로 던져 그 돌에 맞아 죽게 되었다.
이와 비슷한 힘겨루기 전설은 다른 지역에도 많이 있지만 어쨌든 배방산성의 유래를 가름해 볼수 있다.
혹은 배가 방에게 엎드려 항복했다해서 ‘복부성’이라 했다고도 한다.
말하자면 부복(俯伏)했다는 것이 그렇게 전설에 반영된 모양이다.
이들이 백제 충신 성충의 조상이라고도 한다.
또 하나의 전설은 고려 태조왕건이 후백제 견훤 세력을 막기 위해 이 산성을 쌓았다는 것이다.
왕건과 관련된 유적이 천안 지방에 상당히 많이 있다. 후백제와 고려의 세력다툼 과정에서 이 지역이 여러차례 지배세력이 뒤바뀐다.
유금필 장군등이 우리 지방에 머물다가 청주지역 싸움에 나섰다는 기록도 있다. 공수리쪽에서 올라갈 수도 있지만, 신흥리 쪽이 좋다.
산길 옆에 계곡이 있어서 당시에 물 걱정을 덜 했겠다는 생각을 하며 드문드문 핀 진달래를 보며 오르면 산성의 서쪽 문터에 이른다.
우리 고장에서 가장 큰 산성으로, 꼭대기 부분을 빙 둘러 1,500m나 바깥면을 돌로 차곡차곡 쌓아갔다. 모산쪽에서 성재산을 보면 눈에 거슬리는 것이 고압선 철탑인데, 이 철탑공사를 하기 위해 길을 내었다고 한다. 원래도 성 dksWHr을 평평하게 회랑처럼 다듬어 놓았던 것으로 보인다.
성 전체를 한바퀴 돌아보는 것이 좋다. 서문에서 오른쪽(남쪽)으로 가면 곧 우물을 만난다.
지금은 쓰지 않아서 뚜껑을 덮어 놓았고 주변은 만신들이 굿을 했는지 울긋불긋한 천이 나무에 묶여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內有二井有軍倉’이라 했으나 또 하나는 찾지 못했다. 대부분의 성벽은 무너진 상태고, 남쪽 성벽중에 제대로 남은 부분이 좀 있다.
서남쪽과 북쪽에 군창등의 건물터로 보이는 곳이 있고 정상부근도 평지가 있다.
성의 거의 전 지역에서 백제토기로 보이는 회색 경질 토기가 보이고, 기와 조각도 많다.
단순히 전쟁때만 사람들이 머물지 않고 평상시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머물던 때가 있었나 하고 생각해본다.
특이하게 갈색토기 조각을 볼수 있었다.
백제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온조왕이 탕정성을 쌓았다고 했으나 구온양의 ‘읍내리 산성’은 큰 싸움에는 적합지 않아 보이니. 상호보완적 기능을 가진 배방산성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적어도 군사적인 면에서는 배방산성이 훨씬 효율적이었으리라.
실제로 천안쪽과 봉강천, 곡교천 일대와 온양쪽이 훤히 보인다.
동북쪽과 북서쪽에는 좀 높가 약간 돌출된 부분이 있어서 장대로 사용된 것 같다.
그래서 고려나 조선왕조때까지 중요한 기능을 갖게 되었으리라. 구온양쪽에서 보면 띠를 두른 것 같이 선명하다.
솥을 엎어놓은 것 같다해서 복부성(伏釜城)이라 했다고 한다. 길이 웬만하기 때문에 가족이 소풍삼아 가볍게 다녀올만 한 곳이다.
우리 고장은 쉽게 다녀볼 산성이 많아서 좋다.
<아산향토문화연구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