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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사실을 사실대로 수록하여 뒤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없는 사실을 있는 것처럼, 있는 사실을 고의로 누락시켜 역사 인물을 훌륭하게 여기도록 기술하는 것도 있다. 윤봉길(尹奉吉) 의사에 관한 기록은 역사상으로 이미 알려진 바 있다. 1908년 예산에서 아버지 윤황(尹璜)과 어머니 김원상(金元祥)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본관은 파평이고, 호(號)는 매헌(梅軒)이다. 10세 되던 해에 덕산보통학교(지금은 초등학교)에 입학했으나 다음 해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고 자퇴했다고 한다. 동생인 윤성의(尹聖儀)와 함께 한학을 공부했고 1921년부터는 오치서숙(烏峙書孰)에서 사서삼경 등 한문학을 계속했다고 했다. 한문학 공부를 마치고 1926년부터 농민계몽, 독서회운동 등 농촌사회 운동을 했다. 이때에 농민계몽을 위해 농민독본(農民讀本)이란 교재를 집필해 야학회를 조직하고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농촌의 불우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농촌의 발전을 위해 부흥원(復興院)이란 단체를 설립해 농촌 부흥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했다. 여기에서 밝혀둘 것은 다름 아니라 ‘농민독본’은 천도교 농민회에서 발간한 것을 그대로 복사해 학생에게 배부한 것이지, 윤 의사가 직접 집필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여러 문헌에 의해 밝혀졌다고 이상재 교수(현 83세)가 밝혔다. 이상재 교수는 고향에서 평생 향토사를 연구하면서 홍성의 의병 의사총은 의병 의사총이 아니라 갑오(甲午) 동학혁명운동 때 일본군과 정부군에 의해 학살된 수십만명의 동학군 주검의 의총이라고 주장했다. ‘홍성의사총소고’라는 책자를 2000년 2월 10일에 발간하면서 당시 의병간부는 전사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며 모두 와석종신(臥席終身)하고 국가로 부터 포상을 받아 묘역이 모두 화려하게 장식됐으며 당시 의병 시체는 애국시하여 유족들이 모두 찾아가고 의총에는 한사람도 없다고 밝혔다. 윤봉길 의사는 1930년 3월 6일 평안도 선천에서 체포돼 45일간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조국을 위해 무엇인가 큰일을 해야 된다는 신념으로 “장부(丈夫)가 집을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남기고 만주로 떠났다는 말은 윤 의사의 아우 윤성의가 지어서 말한 것이지, 윤 의사가 한 말은 아니라고 이상재 교수는 말했다. 윤성의가 말한 그 말의 어원은 일본무사(사무라이)들이 자주 말한 것을 이용한 것이지,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만주로 도망가기 전에 일경이 가만히 두겠는가? 윤성의로 하여금 오도된 것이 많아 도리어 윤의사의 명예에 훼손됨이 있었다고 했다. 윤 의사의 아버지 윤황은 술을 많이 했으며 어머니 김원상은 착실했다. 인접에서 살던 이(李)씨라고 하는 부인은 “학식이 많아 친하게 지냈으며 이씨 부인의 양반집 예절 영향을 많이 받았을 뿐 아니라 김원상 친정부모가 동학인(天道敎人)으로 매일 새벽에 장광(장독대)에 정한수(淸水)를 봉존하고 윤 의사와 어머니가 같이 주문을 외우고 기도했다”고 생존 당시 술회했다고 밝혔다. 아마도 윤 의사는 어머니 지도를 많이 받았다고 했다. 또한 윤 의사는 자기 선배인 박재영의 친분있는 지도를 많이 받았으며 또한 갑오동학 혁명 당시 김구 선생은 동학군 두목으로 황해도 해주성을 침공하다 패전하고 피신하다가 일본군 대위를 타살하고 안중근 의사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만주로 도피했다고 하는 내용은 이미 밝혀진 바이지만 김구 선생의 동학사상이나 윤봉길 의사의 동학사상의 기점이 같으므로 좌익의 유혹에 말려들지 않고 끝까지 민족지상 국가지상의 사상으로 일관한 것이라 하겠다. 좀 심도있게 말하자면 춘암 박인호 선생의 정신적 지도의 영향이 있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춘암 선생은 8·15해방 6년전 우리나라 사람들이 모두 일본화 됐을 때 멸왜운동을 한 것이다. 매헌이 24세의 젊은 청년이 일본군 시라카와(白川義 ) 대장에게 폭탄을 던져 살해한 것은 장한 의거다. 매헌에게 1962년 건국훈장과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으며 이는 정말로 정말로 장하고 훌륭한 애국자다. 지금 사람들은 거개가 사리 사욕에 충만된 가짜 애국자들 뿐이다. 한심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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