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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군, 온궁과 이순신 본가에 분탕질

‘동아시아 속의 전쟁과 아산만’ 학술대회 요약(3)

2010년 08월 13일(금) 17:43 [(주)온양신문사]

 

 

‘임진왜란과 아산만’

김일환(아산학연구소 수석연구원)

 

註> 아산시와 협력을 통해 운영하는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소장 김기승)가 ‘동아시아 속의 전쟁과 아산만’이란 주제로 창립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번 학술대회 내용을 4회에 걸쳐 정리했다.

<연재 순서>

▲‘백제부흥전쟁과 아산만’ 장학근(순천향대 이순신연구소장)

▲‘대몽항쟁과 아산만’ 윤용혁(공주대 교수)

▲‘임진왜란과 아산만’ 김일환(아산학연구소 수석연구원)

▲‘청일전쟁과 아산만’ 이덕일(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장)

 

 

아산지역은 임란 때 그 배후 지역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임란시 전라도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했지만 해상으로 전라도와 경기와 황해도 연결하면서 열려있는 충청해로(忠淸海路)의 중요성은 언급되지 않았다.

 

호남에서 서울로, 의주로 가는 바닷길에서 그 중간 통로가 아산만이었다. 피난지에서 국왕 선조로부터 사명을 받은 관료들이 지방으로 떠날 때 중간 기착지였으며, 정철이나 김성일 등이 이 아산만수로를 따라 지방으로 이동했다.

 

임란 중 타계한 이순신의 노모의 시신과, 노량에서 전사한 이순신의 시신이 이동한 경로이기도 했다. 아산만이라는 수로의 거점이 상실됐더라면 임란전쟁수행에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을 것이다.

 

아산만은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에서 전라도로 가는 길목이고 전라도와 충청도의 물산을 수로로 서울과 황해도로 이동하는 중개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했던 것이다.

 

육상은 마비됐지만 이 지역 해상을 통한 조운로가 건재했고, 이를 통해 활동하던 민간 상업망이 원활하게 작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때문에 따라서 전쟁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이 흐르고 이에 편승해 유언비어도 횡행했다. 이런 가운데 전쟁의 패배와 전쟁 수행과정에서 민에 대한 수탈이 상당히 이루어졌다. 이 가운데 왕과 정부에 대한 민의 불만이 자연적으로 커지고 이것이 계기가 돼 이 지역에서 임란 중 유일하게 민중반란이 일어나게 된 이유가 됐다고 보인다.

 

전란 이후에는 왜병이 짓밟지 않은 곳이라 농토가 안전하게 보존되었던 곳이어서 전결이 3천결이나 남아 있었다.

 

이러한 자연환경 조건, 해양을 통한 교통의 편리성, 농토의 풍요함이 서울에서 사대부들의 새로운 낙향지로 인식되어 아산을 비롯한 내포지역에 전장(田莊)을 두지 않은 사대부가 없다고 인식됐다.

 

실례로 박지계 등 임란 때 이미 피난 왔다가 다시 오는 경우가 있었고, 이런 사람들의 이주(移住)는 이 지역의 문풍(文風)을 형성하고 진작하는데 크게 기여했고, 이곳에 농장을 가진 관료들이 많았다. 한편 이 지역은 유배지로서도 유명했다.

 

임진왜란 때 서해 해로는 유일하게 조선측이 장악하고 있는 가장 안전한 해상 통항로였다. 육로도 전라도에서 경기도로 북상하는 안전한 길은 전라도에서 충청도 지방을 지나 상경하는 루트였다.

 

이런 이유로 북쪽으로 피난하는데 실패한 왕실가족 뿐 아니라, 사족층(士族層)을 비롯한 타 지역 사람들이 내포(內浦)를 중심으로 한 호서지방으로 많이 피난했다.

 

이 지역은 차령산맥을 타고 아산의 영인산, 내포에 있는 가야산뿐 아니라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인 유구와 같은 안전한 피난처가 많이 산재돼 있다. 이런 이유로 내포지역은 현지민과 이주해온 피난민이 뒤섞인 상태에서 전란 중 큰 혼란을 경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조선정부는 전라도와 호서지방만이 왜적으로부터 안전하게 보존되었으므로 전란에 필요한 군수물자와 새로 참전한 명나라 원병의 군량미를 대부분 이곳에서 조달했다. 따라서 아산만(牙山灣)은 이런 물자들이 집하(集荷)돼 선적되는 장소여서 인근 각 읍에서 조달한 세곡뿐 아니라 수철(水鐵)같은 무기제조를 위한 전쟁물자가 산더미 같이 쌓여 있었다.

 

내포가 전쟁의 특수(特需)속에 타 지역과 달리 물산이 집중하는 곳이 되자, 전란 중에 중앙정부의 감독이 소홀한 틈을 타고 현지 지방 관리들의 탐학행위가 점차 가중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군량미를 징발한다는 명분하에 민에게 수탈한 세곡을 착복하는 사례가 많아 큰 배를 대고 실어낼 정도로 폐해가 극심했다.

 

전란으로 인한 고통 뿐 아니라 부패관리들에 의해 자행되는 수탈로 인해 이중적인 고통을 당하던 이 지역 사람들은 자연히 조선정부와 관리들에게 큰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민에 대한 통제도 무너져 초적(草賊)들마저 들끓게 되자 민들의 고통은 더 한층 가중됐다. 이것이 송유진과 이몽학의 반란이 내포에서 일어나게 되는 토양이 됐던 것이다.

 

누적된 민들의 불만이 민란으로 터지고, 이 지역 사람들의 호응이 커지자 조선정부는 크게 당황했다. 조선정부는 이들의 반란이 이반된 민심을 타고 전란 중에 있는 왕조의 운명을 바꿀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에 이 지역민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하고 진압했다.

 

반란에 참여했거나 참여하지 않은 사람까지도 반란 혐의를 씌워 가혹하게 고문하였고 그 결과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는 사례가 많았다. 이런 사실이 속속 알려지자 이 지역민들의 조선정부에 대한 불만과 불신은 하늘을 찌를 듯이 증폭됐다.

 

이렇게 지역민의 감정이 악화되자 조선정부는 호서지방을 ‘패역(悖逆)의 땅’이라고 지칭했고 민심이 이반된 지역민들은 조선정부에 대한 증오심을 더욱 길러갔던 것이다.

 

가혹한 탄압으로 이몽학의 난이 겨우 진압됐지만 호서 내포민들의 불만은 여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는데 이듬해 정유재란이 발생했다. 정유재란으로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일차적인 군사목적을 호남과 호서, 곧 양호(兩湖)를 점령할 것을 목표로 했다.

 

일본군의 침략의 칼끝이 이제 호서지방을 직접 겨냥하고 쳐들어오게 되자 호서민들의 민심은 크게 동요하게 된다. 남원성을 함락하고 전주를 공략한 후 호서지방으로 진출한 일본군은 9월초에 이미 부여, 임천, 한산으로 올라와 공주를 거처 천안으로 진출했다.

 

이때 내포에 왜군이 가득하다고 할 정도로 많은 왜군이 쳐들어 왔고, 이들이 지나가는 곳은 약탈에 의해 초토화돼 개나 닭도 씨가 마를 정도였다고 한다.

 

이들은 천안에서 북진해 다시 서울을 목표로 북상을 시도했지만 직산(稷山)의 소사평 전투에서 명군에게 패해 북상이 저지되고 다시 후퇴하기 위해 남하한다.

 

남하경로는 두 갈래로 나뉘어 하나는 청주를 지나 상주로 철수했다. 그러나 한 무리는 내포를 지나 공주, 부여를 거쳐 옥구로 내려갔다.

 

이 왜적들에 의해 아산(牙山)을 비롯한 내포(內浦)지역은 다시 한 번 크게 유린을 당했다. 아산을 침범한 왜적들에게 온양온궁과 이순신의 본가가 분탕질을 당해 잿더미가 되고 막내아들 이면이 살해되는 사건도 이 무렵에 일어났다.

 

민란과 정유재란으로 초토화된 내포지역은 그 처참한 전흔(戰痕)을 지울 새도 없이 다시 2차 이몽학난의 연루자를 처벌하는 수난을 경험한다. 많은 이 지역민들이 다시 처벌을 당해야 했다.

 

임난 후 선조 37년 이후에 임란공신을 책훈하면서 이몽학난의 공신들을 청난공신으로 책봉하자 이 지역민들을 잔혹하게 처벌했던 수령들이 다수 수훈자로 거명됐다.

 

이런 사실에 지역민심은 약화돼 이들의 살을 씹어 먹어도 원한이 풀리자 않을 것이라고 할 정도로 극심한 분노를 표출했다.

 

이 지역민들의 조선정부에 대한 분노의 감정은 선조(宣祖)사후에 광해군이 등극한 후 까지도 사그라들지 않고 지속됐다. 조선정부는 이 때 충청도관찰사로 유근(柳根)을 파견하여 민심을 수습하기 위한 조치를 취한다.

 

유근은 수탈에 너무 노출된 지역민심을 위무하기 위해 전세(田稅)를 전체적으로 감하자는 건의를 했고, 임란 중에 파괴된 직산의 온조묘(溫祚廟)를 복원해 치제(致祭)한다는 조처도 악화된 지역민의 반감을 수습하기 위한 조처로 이해된다.

 

온양신문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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