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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석의 향토문화기행
아산현 관아 자리를 떠나 영인산 쪽으로 들어가다 보면 왼쪽으로 김옥균묘소 팻말이 보인다. 예스럽게 말한다면 삼일천하의 풍운아 김옥균. 개화당의 핵심 인물로서 급진적 개화운동으로 평가되는 갑신정변의 주역 그가 여기 잠들어 있다? 그렇지 않다.
조선정부가 보낸 자객에 의해 그가 상해에서 암살된 뒤 시신이 일본을 거쳐 서울로 옮겨져 한강변의 양화진에서 다시 능지처참될 때 그와 가깝던 일본인들이 그의 옷가지 등을 수습하여 일본 동경의 외인 묘역에 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서 1914년에 당시 아산군수였던 그의 아들에 의해 이곳으로 이장되었다고 한다.
이런 저런 생각 끝에 곧 묘역에 다다른다. 석물들도 제법 갖추어져 있는데, 둘레에 우거진 벚나무가 오히려 의미 심장한다.
그에 대한 평가는 다양할 수 있다. 부정적 평가는 친일파로서 결국 일본에 이용당했다는 입장이다. 그렇다. 분명 그는 친일파였다. 그러나 그 뒤에 따라붙는 매국노는 그에게 붙여지지 않는다.
김옥균은 청의 방식보다는 일본식으로 전면적, 급진적으로 개혁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했다. 그의 마음속은 어떻게 하면 하루 빨리 조선을 근대화하여 세계사적 대변화의 기류에서 당당히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으리라.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문제점과 아쉬움이 많이 있기도 하지만, 당시에 선택하고 행동에 옮길 수 있는 길이 또 어떤 것이 있었을까? 그렇게 좋게 생각하려해도 왜 그가 백성들과 함께 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계속 남는 것은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벚나무 생각, 아쉬움 등을 안고 발길을 돌린다.
영인산 쪽으로 어우러져 꽤 그럴듯한 풍경을 볼수있었음직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아산리 동편 향교골에 있던 것을 물이 많은 곳이라 좋지 않다하여 토정 이지함이 현재 위치로 옮겨 세우도록 한 것이라고 한다.
각지에 있는 향교의 기본구성과 기능은 대개가 비슷하다.
이곳은 명륜당에서는 교육과 토론을 대성전에서는 중국과 우리나라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린다. 건물배치는 다소 특이한데 정문과 명륜당 내삼문과 대성전 건물을 중앙에 일직선상으로 배치하고 재나 무는 뜰의 좌우에 두는 것이 기본인데 아산향교는 모두가 직선축에서 서로 어긋나 있다.
솟을 대문을 가운데 둔 외삼문에서 바로 붙여 수직사자로 붙어있다.
그래서인지 온양향교나 신창향교는 관리하는 분이 울 바깥에 사시는데 이곳은 지금도 향교안에 살고 있다.
정문은 늘 닫혀 있고 문간 안팎에 농기구 등이 놓여있다.
출입은 길가의 옆문을 이용한다.
남의 살림집에 불쑥 들어가기가 어색하다. 그분들의 거처를 따로 마련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향교 앞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이 시멘트 건물로 딱 막히고 건물 밑기둥 사이의 통로로 다니게 되어 있다.
머리 조심이라는 글이 오히려 짜증스럽다. 꼭 이 자리에 이런 모양이어야 했을까.
향교의 서쪽 담장 밑에 바짝 붙여 세운 활터 건물이다. 활 쏘는 자리에 올라가 보면 바위와 물이 어우러진 앞개울이 내 앞 마당정원 같으니 사람만 좋아할 형상이다.
이 길은 영인산 등산로로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길이기도 한데... 화가 난 마음을 누르며 성큼 개울을 건너 조금 올라가면 불상과 석탑이 반갑게 맞아준다. 가까운 곳에 영인산과 함께 이렇게 좋은 문화 유적이 있어서 영인은 자주 찾고 싶어지는 매력적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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