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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근대사에 있어서 역사학을 전공하는 학자에게 혹 참고가 될까하여 필자가 35년전 알고 있는 사항에 관하여 요점만을 기술하여 본다. 춘암 박인호선생의 제자중 49인이 시천주(侍天主)사상에 기하여 인내천(人乃天)과 사인여천(事人如天)의 윤리(倫理) 이념(理念)으로 분단된 조국을 통일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같은 천도교 계통인 친일주역자 최린 추종자들이 반대로 통일선언장소로 천도교 별관인 우이동에서 하기로 했으나 최린파 계열사람들의 반대로 끝내 별관에서 하지 못하고 1975년 4월 10일 의암 손병희 선생묘소앞에서 49인 이름으로 통일선언을 하고 동아일보를 통하여 만천하에 공포했다. 통일선언장소인 의암손병희선생 묘소까지 박정희 정권하에 있던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참여하고 이사람들이 이르기를 “참으로 좋은 행사를 하는데 우리에게 미리 말을 하고 했으면 더 많은 사람들과 같이 성대히 할 수 있을것을”라고 격려했다. 그 후 각종교인단체 불교, 유교, 기독교연합, 대종교, (천주교는 교황청승인이 없다하여 불참함) 들이 1975년 3월 10일에 실시한 통일선언을 지지하면서 1975년 7월 16일 종교통일선언을 했던것이다. 그러자 당시 중앙정보부는 각 종단대표들에게 가담하지 말도록 압력을 행사했다. 불교대표 조계종 총무원장 손경산 스님은 공금횡령죄로 몰아 재판 받게 한 후 일본으로 축출하고 약 2년후 귀국하여 우이동 암자에서 별세하고 한국 종교협의회 사무총장이였던 김석원씨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정보부에서 풀려나던날 그들의 감시하에서 서울 지역 서대문 소재 홍내과 병원에 입원했다. 통일선언을 주동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홍내과 병원에 찾아가 김석원씨를 면회하면서 이대로 두면 김석원씨가 죽게된다. 자기들이 일제시대때에 고문을 받던 처지를 회상하고 즉시 ‘소쓸개’ 2개를 급히 구해 그것을 쪼개서 그 쓸개액을 김석원에게 먹게했다. 쓸개액을 먹은 김석원씨는 얼마후부터 심하게 설사를 했으며 밤새도록 설사를 계속했다. 다음날 아침에 회진차왔던 병원 원장 홍의사는 깜짝놀라면서 이사람(김석원)은 밤사이에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으니 하며 놀랬다. 그 이유는 정보부에서 복부에 많은 타격을 받아 장이 활동을 못해 먹은 음식물과 똥이 급속도로 내장과 같이 부패한다는 것이다. 내장이 부패하면 자연히 사망하게 되는 것이 상식인데 생존한것이 기적이라고 했다. 그래서 화해도에서 6·25당시 남쪽으로 피신한 김배옥씨란 노인말이다. 일제시 일경에게 잡히여 혹독한 고문을 당한 애국인사들이 많았는데 ‘소쓸개’를 먹은 사람들은 생존할 수 있었기 때문에 김석원씨에게 ‘쓸개’를 먹도록 했다고 했다. 병원 원장 홍의사가 4~50년간 의사생활 했으나 처음배우는 것이라며 도리어 감사의 말을 했다. 그 후 김석원씨는 10여일간쯤 요양을 했으면 좋겠다고 하여 필자는 온양으로 내려가 우리집에서 요양을 하자고 했더니 중앙정보부 사람들이 계속 감시를 하고 있을 것이니 혹 이선생댁에 좋지 못한 해가 있을지? 하면서 사양했으나 필자는 우리들이 주동하고 주장했을 때는 그런 고통을 각오한 것이니 걱정말고 가자고 권유하여 우리집에서 약 10여일간 목욕겸 요양을 했다. 그동안에 염티 송곡에서 거주했던 홍성한씨도 찾아가 위로도 받았다. 특기할 사항은 통일 선언과 종교통일선언을 하자고 주동한 춘암 박인호선생의 제자들 49인은 털끝하나 건들이지 않고 옆에서 조력하고 협력하는 종교단체 지도자들만 고역을 당한 셈이다. 필자들은 그 후에도 1997년 10월 16일자 한겨레신문을 통해 통일선언을 재천명했으나 역사 학자들이 무서운지 외면한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언젠가는 통일에 관한 문제가 적극적으로 거론될것이 명약관화 할것이 확실할 것이다. 그래야 인본주의로 세계속에서 우리나라가 괄목(刮目)할 것이고 세계 평화에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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