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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 TEXT-INDENT: 13px; LINE-HEIGHT: 160%; FONT-FAMILY: '굴림체'; TEXT-ALIGN: justify">천경석의 향토문화 기행 온양의 본터 - 온주동(上 )
어떤 문화유적이나 유물은 그 자체가 갖는 아름다움이나 의미 못지 않게 그것을 만들었거나 당시에 관련이 되어 있는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보는것이 중요하다.
역사적관점에서 보면 오히려 당시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복원해보는것이 오히려 더 필요한 일이 라고 할수 있다. 옛일을 전해주는 기록들을 불충분한 상황에서 그런 노력들을 통해 아주 작은 것 하나에도 많은 사실들을 유추하는 묘미가 있는 것이다.
구온양(온주동을 그 동안 지역에서 부르던대로 “구온양”으로 함)삼국시대 이래로 매우 오랜기간동안 역사가 이어져 온 이지역의 중심지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런사실들을 말해주는 유물이나 유적이 많이 남아있지 않다.
그나마도 주택이나 아파트 등으로 인해 금방 눈에 띄지도 않는다.
그래서 구온양에 가면 별로 볼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지역사람들이나 관광객들의 관심을 끌고 있지 못하는 형편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백제를 세운 온조왕 36년(서기 18년)에 탕정성을 쌓고 대두성의 주민들을 옮겨 살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탕정성은 지금 탕정면이 아니고 온양의 백제때 이름이다.
비록 조신시대에 여러 왕들의 행온(온천 나들이)으로 ‘온궁’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온천동 일대가 온양의 중심지가 된것은 일제 강점기에 장항선 철도가 개통된 이후의 일이다.
구온양은 적어도 백제 이후부터 구한말인 20세기 초까지 이지역의 중심지로서 발전해왔던 것이다.
이곳에서 찾아볼수 있는 백제때의 유적으로는 산성(뒷산에 산성이 있는데, 산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살펴보기로 함)이 있다.
고려시대의 당간지주를 통해 절이 있었음을 알수 있고 , 산기슭에 있는 온양향교와 온주아문을 보며 조선시대의 모습을 생각해볼수 있다. 비록 화려하거나 많은 유적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고대부터 근대까지의 역사를 생각해 볼수 있는 최소한의 것들은 남아있는 곳이다.
온주 아문은 2층누각 형태로 관아의 남쪽에 세워진 출입문이다. 훼손을 막기 위해 요즘은 계단위 통로를 막아버렸다.
긴 사다리꼴의 돌기둥 위에 아름드리 나무기둥을 세워 그 위 2층을 정자처럼 아름답게 만들었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왕권을 강화하는 정책을 펴나가는 과정에서 전국 각 군현의 관아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 ․ 증건했는데 온주아문도 약 130년전인 1871년에 지어진 것이다.
‘온주’는 신라 문무왕때 탕정군을 온주라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앞쪽의 당당한 남산(설화산)을 바라보며, 이문으로 드나들었을 관리나 백성들의 모습을 떠올릴수 있다.
하기야 일반 백성이 이문으로 들어올때는 좋은 일인 경우는 거의 없었으리라.
병졸들이 버티고 지켜 선 문 앞에서 기가 죽은 백성이 서성이는 모습. 그들이 머뭇거리며 서 있었을 자리에는 고덕비 따위가 즐비하다. 그것만 놓고 보면 세상은 당연히 태평성대가 되었으리라.
지금도 역사속에 공덕비를 세워 남기고 싶어하는 사람들로 인해 참으로 많은 모순과 졸속이 자행되기는 하지만 사람이 모든면에서 만족하며 살수는 없는 일이고 그래도 현대에 태어나 사는것이 새삼 다행스럽게 느껴진다.
문안으로 들어가면 최근에 복원된 관아 건물이 한동 있을뿐 정리가 안되고 산만한 상태로 남아있다.
지방자치 시대에 지역의 문화제에 대한 복원, 정비 사업이 여러 가지 목적에 의해 관심있게 추진되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재정적 뒷받침이 부족한 탓에 어려움이 많음을 알수 있다.
우리 아산시도 전통문화를 관광자원화 하는데에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하니 앞으로 계속 지켜봐야 할것같다.
온주 관아 지역에서 서쪽, 파출소 맞은편 갈림길 근처에 당간 지주 1기 서 있다.
당(당)은 깃발, 간(간)은 깃대이니, 당간지주란 깃대를 세우기 위해 만든 돌기둥을 말한다.
불교는 여러 종파가 있었고 사찰도 그 종파가 각각 다를수밖에 없으니 아마 절 앞에 종파를 표시하는 깃발 등을 내걸때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깃대는 대개 나무로 만들어서 전해지지 않고, 지주만 남아있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비슷하게 생긴 것이 절 안의 본전 앞에 있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대규모 행사 때 괘불(‘탱화’라고도 하며, 천에 부처님 등을 그린걸개 그림)을 걸기 위한 것이다. 현재 남아있는 온주동 당간지주는 보물 537호로써 3m 가량의 높이에 기교를 부리지 않고 간결하게 다듬어져 있다.
그 남쪽에 연못이 있었고 북쪽에 사찰이 있었으리라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는 없으되 조신시대의 억불 정책과 관련이 깊을 것으로 주정해 볼 수 있겠다. 계속 (아산향토 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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