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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주완의 [행복한 아산만들기]

한 표의 무게

2026년 06월 05일(금) 08:37 [(주)온양신문사]

 

↑↑ 맹주완(순천향대학교 아산학연구소 소장)

ⓒ (주)온양신문사

기원전 5세기경, 아테네에는 독재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위험인물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적어 10년간 추방하는 도편추방제가 있었다. 당시 아테네의 장군이자 청렴함으로 명성이 높았던 아리스티데스의 일화이다.

도편추방 투표가 열린 날, 광장에서 서성이고 있던 아리스티데스에게 글을 모르는 한 시골 농부가 다가와 부탁했다. “이보시오, 내가 글을 몰라서 그러는데 이 도자기 파편에 이름 하나만 대신 적어주겠소?”. “누구의 이름을 적어드릴까요?”. “아리스티데스라고 적어주시오.” 자신의 이름을 적어 달라는 말에 깜짝 놀란 아리스티데스는 신분을 숨긴 채 농부에게 이유를 물었다. “그 사람이 당신에게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습니까?”. 농부는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아니오, 난 그 사람 얼굴도 모르고 만난 적도 없소. 하지만 어딜 가나 사람들이 그 친구를 정의로운 사람, 정의로운 아리스티데스라며 귀가 따갑도록 칭찬해 대니, 그 꼴이 하도 짜증이 나서 말이오!” 아리스티데스는 묵묵히 농부의 도자기 파편에 자신의 이름을 정성껏 적어주었고, 결국 그 투표 결과로 아리스티데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대중의 시기와 질투가 잘못된 투표 시스템과 만났을 때 얼마나 황당한 결과를 낳는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1869년 미국 와이오밍의 민주당 의원들은 공화당 주지사를 정치적 궁지로 몰기 위해 묘책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동부의 여성을 유인하고 주지사에게 비난을 안길 목적으로 ‘여성 참정권 법안’을 정략적 미끼로 던졌다. 하지만 주지사가 법안에 덜컥 서명하면서, 와이오밍은 뜻밖에 세계 최초로 여성 보통선거를 승인한 주가 되었다. 이듬해 첫 투표일이 다가오자, 법안을 발의했던 의원들은 거친 서부 남성들이 여성들을 모욕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그러나 투표 당일, 총잡이와 광부들이 득실거리던 거친 황야의 투표소에서는 놀라운 반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카우보이들은 투표하러 온 여성 유권자들을 보자마자 마법에 걸린 듯 일제히 정중한 신사로 돌변했다. 그들은 흙먼지 묻은 모자를 벗어 길을 비켜주었고, 여성들의 투표를 방해하지 않으려 극진한 예우를 갖췄다. 심지어 투표소 안에서 담배를 끄고 바닥에 침을 뱉는 거친 오랜 습관마저 스스로 참아내며 품격을 지켰다. 정치인들은 추악한 표 계산 속에서 주사위를 굴렸지만, 평범한 시민들은 제도의 무게를 엄숙하게 받아들였다. 정략적 헛발질로 시작해 시민의 품격으로 완성된 이 사건은 신분·성별·재산에 상관없이 모든 성인에게 투표권을 주는 보통·평등선거 제도를 확립시켰다.

19세기 중반의 투표소는 민주주의의 전당이라기보다 유권자의 목줄을 쥔 권력자들의 사냥터에 가까웠다. 지주나 공장장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는 공개 투표장에서 고용주의 뜻을 거스른 대가는 해고나 폭력이었다. 이 잔인한 악습을 깨부순 것은 1856년 호주에서 등장한 사방이 막힌 나무 칸막이와 공식 투표용지였다.

오늘날 비밀투표의 시초가 된 이 제도가 도입되자, 영국의 기득권 정치인들은 대단히 모욕이라도 당한 듯 분노했다. 그들은 “신사라면 대중 앞에 떳떳이 지지를 밝혀야지 비겁하게 커튼 뒤에 숨느냐”며 야만적이라 비난했다.

미국에서도 이 제도를 두고 유권자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는 음험한 비밀주의라는 황당한 반발이 이어졌다. 기득권층이 부르짖은 떳떳한 신사다움이란 사실 유권자를 마음대로 통제하던 지배의 쾌감에 다름 아니었다. 하지만 권력자들의 호통을 비웃듯, 유권자들은 기꺼이 커튼 뒤 비밀의 공간으로 걸어 들어가 숨어버렸다. 외부의 뇌물과 협박이 두꺼운 천을 뚫지 못하게 되자, 자본가들의 선거 매수 행위는 단숨에 역사 속으로 퇴장했다. 기득권이 손가락질했던 그 작은 칸막이야말로 가장 평범한 시민들에게 비밀·직접선거의 길을 열어주었다.

↑↑ 사진은 제미나이가 만든 가상 투표소 이미지

ⓒ (주)온양신문사


일부 투표구의 투표용지 부족 사태라는 오점을 제외하면, 제9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외견상 무사히 막을 내린 듯 보인다. 하지만 상세한 지표를 들여다보면 아쉬움이 짙게 남는다. 전국 평균 투표율이 61%에 달한 반면, 아산시의 투표율은 54.2%에 머물며 전국 평균을 밑돌았기 때문이다.

임시공휴일 지정이라는 제도적 배려가 무색하게도, 아산시 선거인 302,051명 중 주권을 행사한 유권자는 163,694명에 그쳤다. 선거는 후보자의 화려한 수사를 걷어내고, 공동체의 미래를 수탁할 참된 지도자를 가려내는 과정이다. 민주주의의 꽃인 선거를 최종적으로 완성하는 주체는 대의와 품격, 그리고 투철한 책임감을 지닌 지도자를 식별해 내는 유권자의 성숙한 안목이다. 주권자로서의 신성한 권리를 스스로 방기한 이번 투표 결과가 못내 뼈아프게 다가오는 이유다.

온양신문사 기자  ion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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