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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환의 [행복한 아산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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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서(泉西) 윤혼(尹焜)의 『천서유고(泉西遺稿)』 발견과 18세기 아산의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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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10월 06일(화) 09:59 [(주)온양신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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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아산의 지성사를 대표하는 두 인물은 외암(巍巖) 이간(李柬, 1677~1727)과 천서(泉西) 윤혼(尹焜, 1676~1725)이었다. 이들은 우암 송시열(宋時烈)의 적전(嫡傳)을 계승한 수암(遂庵) 권상하(權尙夏)의 수제자로 조선 후기 최고의 성리학 논쟁인 ‘호락논변(湖洛論辨)’을 주도한 탁월한 성리학자들로 평가된다.
그동안 외암은 문집인 『외암유고(巍巖遺稿)』가 현존함에 따라 학계에서 많이 연구되어 유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천서는 그의 문적(文籍)이 전해지지 않아 이간의 친구요, 인척이며 외암리에 살았다는 일반적인 이야기만 전해질 뿐, 성리학자로서 그가 가진 진면목을 구체적으로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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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새로 발견된 『천서유고』 표지 | ⓒ (주)온양신문사 | 그런데 최근 아산시 문화유산과 학예사인 지원구 박사가 치열한 탐문 끝에 300년간 출간되지 못한 채 파평 윤씨 문중에 보관되어 내려오던 『천서유고(泉西遺稿)』 초본(草本)을 찾아내어 학계에 소개함에 따라 천서의 성리 철학과 호락논변을 바라보는 그의 학문적 입장이 명료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문집의 공개로 17, 18세기 호락논변에 대해 연구가 심화되는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어 학계에는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천서 윤혼은 1676년 태어나 외암리에서 성장하였다. 외암천을 가운데 두고 동편에는 외암 이간이, 서편에는 천서 윤혼이 살아 호(號)도 천동(泉東), 천서(泉西)로 지었다 한다. 두 사람의 가문은 천서의 고조부인 윤근(尹根)이 예안 이씨 온양 입향조인 이사종(李嗣宗)의 손서(孫壻)가 되면서 인척이 되었다. 가까이는 윤혼의 숙부가 이간의 이모부가 됨에 따라 서로 척족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이런 여러 이유로 평생의 친구가 된 두 사람은 20대부터 성리학 탐구에 큰 열정을 보여 늘 함께 공부하고 토론하였다. 20대 후반에 교유의 범위가 확대되어 ‘호중학사(湖中學士)’라 불리며 예산, 덕산, 홍주에 살던 수암 권상하의 제자인 신유(申愈), 신경(申憼) 형제, 현상벽(玄尙璧), 한홍조(韓弘祚), 최징후(崔徵厚), 최안후(崔安厚) 형제, 우세일(禹世一), 조태만(趙泰萬) 등과 어울려 열심히 공부하고 토론하며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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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관선재(觀善齋) | ⓒ (주)온양신문사 | |
1707년 사우들의 권유를 받아 윤혼, 이간은 32, 31세의 늦은 나이에 권상하의 문하에 입문하여 사제관계를 맺었다. 이후 권상하는 이들의 학문성을 인정해 자신의 고제(高弟)로 받아들이고 ‘관선재(觀善齋)’라는 편액을 써 주었다. 윤혼과 이간은 광덕산 외암천 상류에 학우들과 공부하는 강학소인 ‘외암정사(巍巖精舍)’를 짓고 관선재라는 편액을 내 걸었다. 현재 외암리 강당골에 강당사(講堂寺)라는 사찰이 그곳이다.
이때부터 사우(社友)들과 학술적 논쟁을 치열하게 전개하였는데 결성(結城)에 사는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 1682~1751)과 논변한 ‘인물성동이론(人物性同異論)’이 그 중요 논점이었다. 이것은 인간과 사물이 본래 본성이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 하는 논쟁이다.
인간과 동물이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은 이간과 윤혼 뿐 아니라 서울을 기반으로 하던 성리학자들이 동조하여 ‘낙론(洛論)’이라 한다. 반대로 인간과 동물은 본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학자들은 한원진을 비롯한 충청 내륙에 거주하는 인물들이어서 ‘호론(湖論)’이라 한다.
이 논쟁은 사변적이고 철학적 관념론만이 아니었다. 당시 명(明)에서 청(淸)으로 왕조가 교체된 중국을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하는 세계관의 변화와 관련되어 있었다.
신흥 청나라가 일으킨 두 번의 호란(胡亂)에 패해 항복한 조선 양반 지배층들은 치욕을 설욕하고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반청론(反淸論)이 우세하던 시기였다. 당시 조선의 지배층은 청나라를 금수와 같은 야만으로 보고 있었기에 청을 동물과 같은 존재로 볼 것인지, 아니면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 볼 것인지를 결정하는 인식이 호락논변의 저변에 깔려 있었던 것이다. 당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철학적 대변이(大變異)를 가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양자 간의 토론은 격렬하였지만 끝내 합의를 이룰 수는 없었다. 결국 스승인 수암 권상하에게 판단을 요청하였고 수암은 한원진의 호론을 옹호하였다. 하지만 이 논쟁은 조선말까지 이어졌다.
천서 윤혼은 관직에 나가 벼슬살이를 했지만 노론, 소론 간에 당쟁이 격렬하게 전개되던 1725년(영조 1)에 5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평생의 도반(道伴)인 외암은 천서의 죽음을 슬퍼하고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고사를 인용하며 그의 주검을 떠나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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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김일환(전 호서대 교수) | ⓒ (주)온양신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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