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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경석의 향토문화 기행...2 인주 공세리를 찾아
자연의변화는 눈에 띄지 않으면서 말 그대로 언제 그렇게 되었나 싶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상전벽해라는 말을 실감하는 경우가 잦은 것이 요즘 세상의 급속한 변화 모습이다.
어쩌면 그런 말 자체가 쑥스러울만큼, 개발로 인한 엄청난 변화가 계속되고 있다. 아산만 일대의 변화는 두가지 변화 모습이 잘 나타나고 있다.
온양에서 연인을 거쳐 차로 20여분 가량을 북쪽으로 올라가면 인주면 공세리가 나온다.
신풍산 북쪽 맨 끝 언덕위에 우뚝한 천주교 성당으로 금방 알아볼수 있다.
이곳이 조선시대 3대 조창중의 하나인 공진창(흔히 ‘공세곶창’이라고 한다)이 있던 곳이다.
조창이란 세곡(조세로 걷은 곡식)을 모아서 이듬해 봄에 서울의 경창으로 운반하기 위해 쌓아두던 곳이다.
공진창은 지금의 충남은 물론 충북과 전북 일부의 세곡이 모이던 곳이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그 책임자인 해운판관은 관찰사(감사. 현 도지사)못지 않은 권한을 행사했다고 한다.
조선 초기에도 끊이지 않았던 왜구등에 대비하기 위해 주종 때 80여칸의 창고를 짓고 아산만에는 고려시대에도 하양창이라는 조창이 있었으니, 조운(세곡을 배로 운반하는 일)과 관련하여 늘 중시되었음을 알수 있고 오늘날 아산항의 개발이 결코 우연의 일은 아닌것이다.
지금은 성당과 민가, 농협 창고가 들어서 있고 남문쪽의 성벽 일부와 주변에서 옮겨 온 “3도 해운판관비” 6기만 남아있다.
예전에는 마을근처까지 바다였다고 하는데, 지금은 방파제 공사로 비옥한 논이 넓게 펼쳐져 있고, 아산만 방조제와 삽교천 방조제를 잇는 도로가 시원스레 뚫려있다. 공세리 성당은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1894년)로 세워진 교회라고 한다. 태안반도와 아산만 지역은 예부터 중국과의 교통로로서 매우 중요한 것이었는데 조선 후기에 천주교 전파 과정에서 충남 내포지방은 가장 빠른 지역에 속했기 때문이리라.
올라가 보면 주변 경관이 훤하게 들어온다.
지금의 본당 건물은 1922년에 세워졌고 , 민가를 사용하다가 세운 초기의 건물은 사제관등으로 이용되고 있다.
해미읍성에서와 같은 피비린내 나는 박해가 우리 지역에서는 없었지만. 병인박해 때 순교한 3인의 묘소가 옮겨져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생각해보게 된다. 성당에서 내려와 아산만 방조제를 다녀오는 것도 좋은 일이다.
방조제로 만들어진 호수는 근대의 시작과 더불어 씻을수 없는 씁쓸한 역사의 기억을 간직하고 있다. 잘 알려진 대로 백성들의 요구를 가벼이 여기고 외세에 의지하던 민씨정권이 끌어들인 청의 군대와 일본 군대의 충돌로 인한 청 ․ 일전쟁이 시작된 곳이 아산만 백석포 일대이다.
밀어닥친 외세의 침략과 횡포속에 당시 이 일대에 살던 주민들이 겪었을 고통이야 이루 말할수 없는 것이었으리라. 위정자들의 실정으로 인한 피해는 궁극적으로 애꿎은 백성들에게 고스란히 떠넘겨진다.
이제는 아산항과 공업단지 등이 본격적으로 개발 된다고 한다. 국토의 균형 발전과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해 바람직한 일이다.
다만 여천공단의 오염문제가 떠들썩한 이 대 개발이 곧 환경과 전통문화의 파괴로 직결되었던 과거의 숱한 오류가 되풀이 되지 않길 빌 뿐이다.
-아산향토문화 연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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