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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선조 25)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자국의 복잡한 내부사정에 따른 정국 혼란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돌리려고 조선을 침략했다. 이후 1598년까지 7년간 2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으니 이를 ‘임진왜란’ 또는 ‘7년전쟁’이라 한다. 1597년의 제2차 침략으로 일어난 전쟁만을 따로 언급할 때 ‘정유재란’이라고도 부른다. 이 정유재란에 앞서 조선은 ‘난(亂)중에 난’을 만났으니 바로 ‘이몽학의 난’이다. 왕족의 서자 출신인 이몽학은 당시 출신에 따라 신분을 차별하는 사회에 불만을 품고 한현과 함께 동갑회(同甲會)를 조직해 사람들을 모은 후 홍주 무량사로 들어가 그곳에서 승려들과 함께 1596년(선조29년) 난을 일으켜 단숨에 일대를 함락시키키는 등 승승장구했다. 이 때 홍주목사 홍가신을 중심으로 5인이 이 난을 평정했고 훗날 선조는 이 5인을 ‘청난공신’으로 봉했으니 그중 1등이 홍가신이었다. 조선조에서는 각종 난과 관련해 공을 세운 신하에게 녹훈을 내렸는데 바로 선무공신(宣武功臣), 호성공신(扈聖功臣), 청난공신 등이다. 모두가 아다시피 임진왜란 선무공신 1등에는 이순신, 호성공신 1등에는 이항복 등이 내려졌다. 이들의 공은 당시는 물론 후세에도 모르는 이가 거의 없다. 그러나 같은 ‘공신 1등’임에도 만전당 홍가신에 대해서는 그리 널리 알려지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공교로운 것은 선무공신 1등인 여해 이순신과는 친구이자, 고향이웃이며, 사돈지간이었다는 것인데 작금 양자간의 격차는 비교가 무색할 지경이다. 이 점에 대해 특히 만전당 선생의 종택이 있는 아산지역에서는 더욱 섭섭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던 중에 지난 11월 14일 염치읍 대동리 ‘황골’에서는 ‘홍가신유물기념관’이 개관했다. 이 자리에는 남양홍씨 문중을 비롯 시장, 국회의원, 도의원, 시의원과 지역주민 등 다수가 참석해 축하했다. 유물기념관에는 선생의 영정과 연보, 가계도를 비롯해 생애와 서거·배향, 선생과 후손으로 정리된 각종 유물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각종 교지와 문서, 서적을 비롯해 당시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유물, 현판, 기둥, 상량보 등이 전시돼 있다. 지난 두어달간 아산은 정부를 등에 업은 이웃 천안과 모질게도 다시 맞붙었다. 이 대결은 시민들의 일치단결로 아산의 승리로 귀결됐지만 다시한번 아산의 정체성을 뒤돌아보는 계기가 됐다. 위기에서 빛나는 ‘아산정신’의 본질은 과연 무엇일까? ‘큰 난’을 평정한 이순신과 ‘난중의 난’을 평정한 홍가신의 정신에서 ‘아산정신’의 맥을 찾아봄도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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