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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자의 어진 도덕을 전천추(前千秋) 후천추(後千秋)에 전하고자 하였으나 전자방(田子方) 단간목이 난법(亂法) 난도(亂道)를 하여 불과 72인만이 도통(道統)하고 말았다고 하며 마지막으로 서화담선생이 도통했다고 한다. 그래서 유선(儒仙)의 운(運)이 그 뿐이라고 한다. 삼강오륜은 3척동자도 다 알고 있지만 지키는 사람이 없다. 음양(陰陽)의 상합(相合)은 미물 짐승도 알고 있는 것, 사람도 그와 같이 자꾸만 그 쪽으로만 치중하고 있는 꼴이니 예의(禮儀)를 외면하고 숫제 망각한 상태이며 보잘 것 없는 서구물질문명에 기대여 문란한 성(性) 문명쪽으로만 홍수처럼 밀려가고 있는 듯 하다. 그래서 제멋대로의 세상이 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정권이 바뀔때는 세상사가 거칠어진다. 위(魏)에서 진(晉)으로 바뀔때에 죽림(竹林) 7현이 있었다고 하듯 소위 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지식에 도취되여 은연중 사람을 무시하는 버릇이 있다. 자기 이외는 잘난사람과 자신 이외에는 지식인이 없다는 식으로 처세하고 있다. 사실상 자기가 전공한 분야에서 한 발짝만 옆으로 내디디면 그 역시 무식하고 아는게 없는 까막눈이 된다. 광활한 넓은 우주의 생성원리와 생멸변화의 이치에 비(比)하면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은 티끌만도 못한 것인데 왜 그리 뻐기고 거드름을 피는지 모르겠다. 도(道)하는 길과 학문(學文)의 길은 대동소이하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실은 차이(差異)가 크다. 도(道)의 위치에서 학문쪽을 볼때는 대단하게 보지 않는다. 학문은 마치 예금한 것처럼 저금한 돈을 다 찾아쓰면 바닥이 드러나는 것과 같으며 도(道)는 그러하지 않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무진장 알고 싶은게 많으며 알게 된다. 마치 샘물 솟아나듯이 말이다. 그래서 생이지지와 학이지지로 구분한다. 공자와 맹자 그리고 석가와 예수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동학계에서 말하는 수운(水雲)과 해월(海月) 의암(義庵)과 춘암(春菴)선생도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 학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람을 무시하는 언행을 한다. 근본(根本)적으로 도(道)를 모르는 얄팍한 자기 지식에 도취된 사람들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알면 알수록 겸손한 것이 바로 예의라고 하겠다. 예의를 모르는 학자들이 많다. 좀 배움이 있음을 과시하면서 도력(道力) 있는 자를 비방하고 있으니 가소로운 일이다. 학자가 학문의 길을 포기하고 머리 깍고 참선(參禪)의 길을 택(擇)하는 사람이 많은 것을 알지 못하니 그 역시 맹맹이다. 사람은 누구나 저 잘난 멋으로 산다고 하지만 이 말은 평범한 사람과 평범이하의 사람들이 주고 받는 말이지 학자를 자처하는 지식인을 자처하는 사람으로선 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겠다. 왜냐하면 겸손성(謙遜性)이 없기 때문이다. 낫을 놓고 기억자도 모르는 사람이라도 자기가 자기 근본을 알면 유식한 사람이다. 그래서 “입을 열어 운(韻)을 띄우면 비록 지게진 나무꾼 앞에 부복하지 않는자 없다”라고 한 뜻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만에 도취한 그야말로 불쌍(不常)한 사람들의 생각이다. 이것이 모두 정신번영을 외면하고 물질번영만 번영으로 알기 때문이다. 백년을 살지못하는 유한(有限)한 인생들이다. 그래서 바르게 살자면 자기 스스로 자기 마음을 지키고 자기 기운을 바로 잡아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공중 도덕관 교육이 희박(稀薄)하고 그것을 지키는 사람 또한 희소하다. 그래서 반대급부적 선행이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서 이기성 선행이라 하겠다. 알고도 행하지 않으면 알지 못함만 같지 못하다는 성현의 말씀이 있듯이 수도하는 사람이 미흡한 지식일지라도 기(氣)죽지말고 떳떳하게 용기내여 살아가야 한다. 심양없는 사람들은 도심(道心) 유무(有無)를 가려보는 안목보다 외형적 사치만 보고 평가하는 잘못된 버릇이 있다. 사치는 진실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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