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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교회’ 백암교회의 파란만장한 역사

박정희 전 대통령의 ‘현충사 성역화’로 말못할 수난 겪어

2008년 06월 20일(금) 14:01 [(주)온양신문사]

 

인주 공세리성당보다 입당 빨라

‘현충사에서 교회 보인다’ 나무로 가리기도

3대 최성모 목사는 민족대표 33인중 한 명

 

아산시 염치읍 백암리 327-1번지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백암 교회(담임목사 김용귀·1991년 부임)는 아름다운 주변 풍광을 자랑하는 전형적인 시골교회이지만 올해로 107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아산 최고(最古)의 감리교회이다.

 

1998년 10월 기독교 대한감리회 국내선교부에서 발간한 연도별 교회창립 목록에 의하면 이 교회는 1901년 5월 24일 창립한 것으로 나타나 전국에서 102번째 오래된 교회에 해당한다.(103번째가 둔포교회로 1904년 4월 5일 창립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백암교회와 비교되는 것이 인주면 공세리성당(천주교회)인데 이 성당은 1894년 교회를 설립해 민가에서 미사를 올리다가 1897년 사제관을 짓고 1922년에 이르러서야 현재의 성당을 건립해 입당했다.

 

그런데 백암교회 역시 최초 개척후 가정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1914년에 교회당(초가 건물)을 짓고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따라서 예배를 보던 교회당 건물만 보자면 백암교회가 인주성당에 앞선다고도 볼 수 있는데 안타까운 것은 그후 이 교회 건물은 박정희 대통령의 현충사 성역화사업으로 인해 1969년 헐리고 이듬해 새로 지어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때 새로 지어진 교회 또한 1992년 화재로  전소되고 이듬해 다시 지었으니 바로 현재의 교회당인 것이다.


□ 1901년인가, 1909년인가

기독교 대한감리회회 본부 역사자료부에서는 백암교회의 설립연도를 1909년으로 보고 있다. 이는 백암교회의 모교회 격인 인천내리교회 사료에 ‘1909년 최봉현 전도사가 온양으로 반이(搬移)했다’고 적혀 있어 이때 최 전도사가 내려와 이듬해 설립한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암교회 100년사를 발간한 이 교회 이민영 원로장로는 “반이란 ‘짐을 날라 이사한다’는 의미로서 이 말에서 최봉현이 충남 온양으로 다시 돌아갔다는 것을 유추해낼 수 있으며 이는 그가 이전에 온양에서 평신도로서 선교 사역을 담당했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해석된다”고 밝혔다.

 

특히 ‘내리교회 90년사’의 다른 쪽에서는 “그후(1908년) 박연화, 박승후, 최은상 세 권사가 최봉현 전도사의 후덕을 그리며 차례로 온양으로 내려가니…”라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최소한 역사자료에서 보이는 창립년도(1909년) 이전에 백암교회가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따라서 백암교회의 원로들은  각종 구전자료와 당시 정황 등을 감안할 때 1901년 5월 24일이 창립년도로 확실하다고 보고 있다. 백암교회에서는 이날을 창립일로 정해 매년 기리고 있다.


□ ‘마름’이 세운 교회?

현재 대한감리교 충청연회 온양서지방에 속한 백암교회는 설립과정이 여느 교회와 좀 다르다. 이 교회는 인천 내리교회 초대교인 중의 한 사람인 최봉현이란 평신도가 세웠는데 그가 온양으로 내려온 이유가 ‘마름’을 보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마름’이란 지주의 땅을 대신 관리하면서 소작인을 정해 소작을 맡기고, 추수 후에 이들에게서 소작료를 받아 지주에게 전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최봉현은 장지순이란 지주의 땅을 관리했던 것이다.

 

1909년 가족을 이끌고 구미동(九美洞;백암리의 옛이름)으로 내려온 최봉현은 당시 마을이 이순신 장군이 살던 터와 그 사당을 모신 현충사가 있는 곳으로, 장군의 본관인 덕수이씨를 비롯하여 양반들이 많이 살던 동네여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가 전무하다는 것을 알고 우선 자기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점 이웃들에게 전도를 시작했다한다.

 

그런데 그의 전도에는 ‘힘’이 있었다. 그것은 그가 ‘마름’이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으므로 소작농들에게 전도를 하면 그들은 좋으나 싫으나 따를 수 밖에 없었다. ‘마름’의 눈 밖에 나면 결코 좋을 게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적지않은 교인들이 예배에 참석하게 됐는데, 일단 예배 참석을 해 ‘말씀’을 듣다보니 차츰 믿음이 생기고 스스로 주변에 전도를 하는 사람까지 생겨나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소작농 아닌 사람들까지 예배에 참석하면서 3개월만에 무려 70명이 앉아서 예배를 드리게 됐다는 것이다.

 

게다가 그 영향으로 이웃마을에까지 복음전파가 왕성해져 그쪽에서도 따로 70여명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고.


□ 급격한 성장

기하급수적으로 교인들이 늘어나면서 이웃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을 ‘예수교인마을’로 불렀다.

 

마을사람 전부가 예수를 믿은 후 술·담배를 완전히 끊은 것을 알기에 이웃마을 사람이 품팔러 와서도 술·담배를 달라고 하지 못했다 한다. 심지어 사람들은 장터나 주막집에서 술 못 먹는 사람들을 보면 ‘구미동 사람들’이라고 놀릴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렇게 교인들이 날로 늘어가자 백암교회 교인들은 스스로 헌금해 감리교 선교부의 도움 없이 자력으로 1915년 당당히 예배당을 건축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예배당의 규모와 형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봉헌한 그 해 이 예배당에서 공주 동·서지방 연합사경회를 연 것을 보면 그 규모가 적어도 200-300명 정도는 족히 예배드릴 수 있는 규모(3칸×4칸=12칸)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 교회의 수난

백암교회는 아산 최초의 기독교 교회라는 위상에 못지않게 수난도 많이 겪었다.

 

일제시대에는 넓직한 내부로 인해 간이학교와 배급소로 쓰이다가 끝내는 일제가 철거하겠다고 하자 이 교회 홍관유 권사가 ‘나를 죽이고 철거하라’며 저항하다가 주재소에 끌려가 옥살이를 하기도 했으며 6·25 때는 인민군의 처소(處所)로도 이용됐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주도한 현충사 성역화사업은 백암교회에 치명적이었다. 1969년 쥐꼬리만한 보상금을 던져주고 교회를 철거했다. 현충사에서 교회 건물이 보인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970년 10월 다시 교회를 지었는데 또다시 현충사 본전에서 교회가 보인다는 민원이 들어가 교회 주변에 커다란 나무를 심어 가리는 동시에 종탑도 설치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나무 사이로 교회의 흰벽이 보인다고 군청색 페인트로 칠해버리라는 지시까지 있었다고 한다.

 

▲ 현충사 성역화와 문화재보호구역 확대로 인해 1969년 헐리고 1970년 다시 지은 백암교회. 현충사에서 교회가 보인다 하여 교회 주위에 큰 나무를 심어 가렸으며 나무 사이로 흰 벽이 보인다 하여 퍼런 페인트를 뒤집어 쓸 뻔 하기도 했다. 현재<기사 맨 위 사진>의 건물은 1993년에 준공한 것이다.

 

이런 수난을 받으면서도 지켜온 교회였지만 1992년 4월 24일 전직 시청 직원(정신이상자)에 의해 방화되면서 전소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후 교인들은 비닐하우스로 된 임시처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화재 소식이 뉴스 등에 보도되면서 성금이 답지해 1993년 11월 11일 현재의 교회가 완공된 것이다.

 

백암교회는 이때도 현충사로 인해 건축의 제한을 받았다. 현충사 성역화, 문화재관리보호법 등으로 인해 당초 3층으로 예정했다가 단층으로 지을 수 밖에 없었으며 종탑도 높게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이 역시 ‘현충사에서 보이기 때문’이었다.


□ 백암교회의 인물

초창기 초가집 백암교회를 지은 사람이 김상철 장로다. 그는 조선말기 고종의 후궁이었던 엄비의 양자로 최봉현의 전도로 교회에 입문한 뒤 주변의 산재당을 헐어버리는 등 적극적인 신앙생활을 해왔다고 한다.

 

김 장로는 특히 이순신장군의 13대 종손인 이종옥씨와 함께 독립군 자금 지원을 하기도 했다. 이씨의 아들이 이응렬씨였고 그의 친구가 아산지역 초대 국회의원인 서용길씨였다.

 

김장로의 아들 김영렬 장로는 국회사무처에 근무했고 그때 초대 기도회장을 맡으며 국회의원 기도회를 처음 만들었다고 한다.

 

백암교회 역대 담임목회자 중에는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한 분도 있다. 바로 7대와 12대 담임옥사였던 최성모목사가 주인공이다. 이는 당시 민족운동의 최일선에 나섰던 교회의 활동상과 그 일면을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현재 백암교회의 신도는 100명도 채 되지 않는다. 그것도 대부분 나이 지긋한 분들 위주라고 한다. 젊은이들은 직장을 따라 시내 혹은 타지로 나갔기 때문이라고.

 

그러나 이렇게 단촐한 교회이기에 더욱 교인들간 친밀감이 더하고 애경사를 함께 나누며 가족같은 교회가 되어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임재룡 기자>

온양신문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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