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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역사에 관한 전문지식이 없으며 소문대로 기술한 것이니 다소 부족한 점이 있다해도 너그럽게 살펴보기 바란다. 필자는 얼마전에 중국 대련지방을 방문한 적이 있다. 느낀 점은 첫째 고구려 옛 산성인 비사성(卑沙城)과 둘째는 여순(旅順)감옥에서 안중근(安中根) 선생과 사학자 신채호(申采浩) 선생에 대하여 더듬어 보며 셋째는 대련지역에서 단동(丹東)까지 약 350㎞과정의 견문기를 기술해 보고자 한다.
첫째 비사성(卑沙城) 비사성은 대련 시가지에서 바라볼 수 있는 가까운 곳에 있으며 고구려의 옛 성이다. 산세가 험하고 경사가 급하며 모래와 같은 토질과 암반으로 형성된 험한 곳이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할아버지는 자유(子遊) 아버지는 태조(太祚)로 모두 막리지(莫離支)를 역임했다고 한다. 동부(東部) 또는 서부(西部) 대인(大人)이었던 아버지가 죽자, 연개소문이 뒤를 잇게 되어 있었으나 성품이 잔인하고 모질다 하여 지위를 계승하지 못하다가 귀족들에게 간청하여 겨우 승인을 받았다. 서기 642년(영류왕) 25년에 천리장성 축조를 감독하는 임무를 맡았는데 그가 아버지의 지위를 이은 뒤 귀족들이 영류왕과 비밀리에 의논하여 그를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것을 먼저 간파한 그는 동부의 군사를 모아 사열하는 체하며 귀족들을 초청한 뒤 급습하여 죽였다고 한다. 그리고 궁궐로 쳐들어가서 영류왕을 살해하고 왕의 조카인 장(臧;보장왕)을 왕으로 옹립한 뒤 자신은 대막리지가 되었다.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시성(安市城) 성주는 그에게 굴복하지 않아 연개소문이 군사를 내어 성을 쳤으나 함락되지 않아 성주의 지위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 당시 정세는 매우 긴박했다. 즉 수나라를 이어 중국의 통일 왕조로 등장한 당나라가 세력을 강화하여 서서히 동쪽으로 압력을 가해오고 있었다. 고구려에서 천리장성을 쌓은 것도 이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또 남쪽에서는 백제와 신라의 충돌이 격화되면서 신라는 당과 적극적인 연결을 모색하고 있었다. 당 태종은 644년에 연개소문의 시역(弑逆)을 성토한다는 명분을 걸고 군사를 내어 직접 고구려 침략에 나섰다. 고구려의 장군 고연수(高延壽)와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출전했으나 안시성 동남쪽에서 대패하고 661년 다시 고구려를 침략해 소정방(蘇定方)이 이끄는 군대가 평양성 부근까지 접근했다. 이때에 아들 남생(男生)을 압록강에 보내 당군이 건너지 못하도록 막았으나 강이 얼자 건너온 당군에게 고구려군이 패하여 남생은 겨우 몸을 피하기도 했다. 이듬해 방효태(龐孝泰)가 이끄는 당군이 다시 침입하자 연개소문은 직접 사수(蛇水) 언덕에서 접전을 벌여 적군을 몰살시켰다고 한다. 그후 당군에게 몰린 고구려군이 후퇴하면서 비사성까지 가면 안전하다고 했으나 계속 밀려 대련땅까지 후퇴했다. 격전장이 된 대련땅에서 밀려오는 적을 방어하고 고구려군을 비사성까지 안전하게 피하도록 방어에 주력하다가 죽은 장수의 이름을 내가 기억하지 못하며 알 수가 없다. 비사성이 있는 산명(山名)을 대흑산성(大黑山城)이라고도 하며 산정에 석고사(石鼓寺)라고 하는 절이 있는데 그 표시판을 보면 이세민(李世民)의 아들 정관(貞觀)이 대군을 이끌고 동정(東征) 고구려군과 같이 대흑산성에 내도(來到)했다고 표시하고 있을뿐 고구려에 관한 역사는 없으며 중국은 수년전에 비사성 앞에 누대를 설치하고 당나라 황제를 표시하는 용(龍)의 조각을 큼직하게 설치했다. 그곳 주민들의 말에 따르면 간혹 조선족들이 지개를 지고 성산을 등산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선조들이 험난한 산세에도 불구하고 축성하기에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그 고초를 흠미해 보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수 천년 전의 선조들의 고초를 되새겨보고자 후생들이 회고(回顧)하는 민족의 ‘얼’말이다. 눈물겨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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