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6-11-03 오후 05:56:05  

전체기사

사설

온천동메아리

기고문

기획기사

종합

칼럼

행복한아산

아산의 야생화

아산의 길

커뮤니티

뉴스 > 기고/칼럼 > 기획기사

+크기 | -작게 | 이메일 | 프린트

오도된 체제에 저항한 민주투사

아산 개화기 인물연구 및 유물조사 (3) 윤보선

2008년 05월 26일(월) 16:44 [(주)온양신문사]

 

임시정부 의정원 최연소 위원 역임

英美 유학으로 자유민주주의 매료돼

군사정부에서도 민주투쟁에 최선 다해


■ 윤보선의 생애와 활동

윤보선(1897~1990)의 삶은 ▲독립운동기 ▲영국 유학기 ▲해방 전의 운둔기 ▲해방 후 공화국 하에서의 저항기 ▲제2공화국 대통령 시절 ▲5.16 이후의 민주화운동기로 나눌 수 있다.

 

그의 삶은 신규식이 지어준 그의 아호 해위(海葦;바닷가의 갈대를 바람에 휘날려도 꺾이지 않는다)의 뜻처럼 오도된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여기에 지도자로서의 책임의식과 이에 따른 높은 윤리 의식이 그의 일생 전체에 함께 했다.


▲독립운동기

1897년 8월 26일 둔포면 신항리에서 윤치소의 6남 3녀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0세 되던 해 서울의 보통학교에 입학해 다니다가 1912년 게이오의 게이쇼학교에서 공부를 했으나 졸업은 하지 않았다.

 

21세 되던 해 몽양 여운형의 주선으로 상해 임시정부로 갔다. 그곳에서 신규식·신석우·박찬익·이시영·이승만을 만났고 전단보를 발행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영국유학기

임시정부 의정원의 최연소 위원이 될 정도로 신뢰를 받았던 그는 선배들의 권유로 1921년 영국유학을 떠나 글래스고우대학, 우드브룩대학, 옥스퍼드대학을 거쳐 엔딘버러대학에서 고고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932년 부친의 강권으로 2년간 유럽여행을 한 후 귀국했다.

 

이후 13년간이나 안국동 집에서 칩거했다. 상해임시정부 요원 전력 때문에 일제의 감시가 심히졌기 때문이다. 운둔기였다.


▲저항기

해방후 비로소 감시에서 풀려난 윤보선은 백남훈·김도현·허 정·최윤동·장덕수 등과 함께 한국국민당을 창당했다.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서울시장을 거쳐 상공부 장관에 임명됐으나 생고무 배정문제와 이태환 경질문제로 중도사퇴 이후 이승만의 독단적이고 왜곡된 현실인식에 반발 1952년 부산정치파동을 계기로 결별하게 된다.

 

그후 윤보선은 제3대 총선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 당선됐다. 이후 민국당의 후신인 민주당의 주요 당직을 맡아오다가 유석 조병옥의 사망 이후 민주당 구파(舊派)의 최고지도자로 추대를 받는다.


▲대통령 시절

이승만 정부 붕괴후 윤보선은 제2공화국의 대통령으로 추대됐다. 그러나 내각책임제 하의 실세는 신파(新派)의 장 면 총리였으므로 윤보선은 상징적인 존재였다. 허나 국가원수로서 책임을 다하고자 민주당을 탈당하고 일정한 선 이상을 넘지 않으려 노력했다.

 

▲ 실권은 없고 상징적인 존재로서의 대통령에재임중일 때의 윤보선 전 대통령. 그러나 국가원수로서의 책임을 다하고자 민주당을 탈당하고 월권하지 않으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장 면 정부는 실권도 없는 윤보선의 발언을 구파지도자의 발언으로 간주해 견제가 극심했다. 게다가 5/16 군사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군사정부로부터도 철저하게 소외되었다.

 

그런 고통과 인고의 세월을 10개월이나 겪으면서도 실권 없는 상징적 존재라는 법적 제한을 지키려 했다. 그 과정에서 여러 비판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국가 전체를 보호해야 한다는 그의 신념과 책임의식은 고지식하다 할 정도로 확고했다.


▲민주화 운동기

군사정부에 의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 1990년 7월 18일 삶을 마칠 때까지 그는 사상과 신념인 자유민주주위를 위해 저항과 투쟁을 계속했다.

 

한일회담을 반대했으며 박정희의 일본식 근대화운동도 거부했다. 윤보선은 서슬이 시퍼렇던 유신체제에서도 1973년 ‘민주회복 국민회의’를 결성해 1976년 이른바 ‘명동성당사건’ 등 민주화운동을 이끌며 유신체제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이후로도 민주구국헌장 발표(1977년 3월), 개헌요구(11월), 3·1민주선언 발표(1978년), 구국선언 발표(10월) 등 박정희가 암살된 이후까지도 민주화를 위한 그의 싸움은 계속됐다.

 

특히 10·26직후 유신헌법의 철폐와 조기 민주화를 위해 ‘YMCA위장결혼사건’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등 한국의 민주화와 유신체제하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복귀와 복원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 윤보선과 장 면과의 갈등

제2공화국 당시 정권을 잡았던 민주당은 민국당 계열의 구파와 조선민주당 계열의 평안도 그룹과 원내 자유당 인사들이 연합한 신파로 나뉘어 갈등을 겪었다.

 

더 정확히 들여다보면 구파는 일제 강점기부터 전통적 민족주의 정치엘리트로서 한민당·민국당을 계승한 충청과 호남출신이 대부분이었던 반면 신파는 미군정하에서 보다 현실적 영향력을 갖고 있었던 서북출신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60년 장 면 총리는 신구파가 합심해 나라를 일으켜보자는 의도에서 제안했던 신파 5:구파 5:무소속 2석의 내각을 파기하고 신파 10:구파 1:무소속 1:원외 1로 내각을 발표했다.

 

윤보선은 계파를 초월해서 대통령의 책임을 가지고 정부에 조언을 했으나 장 면과 신파는 그의 말을 구파의 정파적 발언으로만 제한시켰다. 구파 또한 신파를 비난하며 수습하려는 윤보선의 만류를 뿌리치고 탈당했다. 이렇게 해서 신파는 ‘민주당’으로 교섭단체를 꾸렸고 구파는 ‘신민당’으로 이름을 정하면서 두 계보는 완전히 결별한 것이다.

 

장 면 정부는 새로운 공화국을 만들어가는데 필요한 합리적 절차에 의한 협의와 타협을 통한 통합을 이루지 못했다. 신파 내부에서조차 소장파에게 외면을 당했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분출된 다양한 요구에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했고 결국 끊이지 않는 데모를 방치했으며 이것은 끝내 군부에 의한 쿠데타의 빌미로 작용했던 것이다.

 

 


■ 윤보선과 박정희의 갈등

윤보선, 박정희의 일본식 근대화 추구 거부감

 

윤보선은 그의 일생 내내 반일정신과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노력했다. 그런 이유에서 이승만과 결별을 했고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끝까지 저항까지 했던 것이다.

 

 

윤보선은 박정희 정부가 일본의 산(産)·군(軍) 복합체와 극우세력을 배경으로 유착되었다고 보았고 그러한 이유로 박정희 주도의 근대화운동을 거부했던 것이다.

 

윤보선이 추구한 것은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영국과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였다. 이 사상의 기본 요소는 인간 존엄성의 존중, 자유와 평등의 인정이다. 이로부터 정치·사회적 계명이 생겨났다고 본 것이다.

 

박정희는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후 ‘조국 근대화’ ‘새역사 창조’ ‘민족중흥’ 같은 표현으로 경제성장이 곧 민족발전이라는 논리를 폈다. 이 과정에서 국가는 주도하고 국민은 따라야 한다며 개인주의나 자유민주주의를 배격했다.

 

특히 박정희는 자신의 이와 같은 사상을 자신을 반대하는 그룹이나 노동자계급에 대한 통제 이데올로기로도 활용했다.

 

두 사람의 갈등을 근대화의 문제에서 제한해서 본다면 그 갈등은 서구형 근대 자유민주주의를 이상적으로 보았던 윤보선과 일본식 모델이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던 박정희와의 인식의 차이로 인해 생긴 것이라 하겠다.

 

 <임재룡 기자>

온양신문사 기자  
“지역정신 온양신문”
- Copyrights ⓒ(주)온양신문사.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주)온양신문사 기사목록  |  기사제공 : (주)온양신문사

 

 

시민들의 가까운 이웃, 신우새마을금고 [온양신문사] 기자

김예진 화가, 첫 개인전을 열다 [온양신문사] 기자

꽃보다 아름다운 사람, 이현상 [온양신문사] 기자

“아산이 참 좋고 자랑스러워요” [온양신문사] 기자

농부가 된 교수, 김동진 별빛생태농원 대표 [온양신문사] 기자

“놀이가 세상을 행복하게 만든다” [온양신문사] 기자

정쟁에 휘둘리지 않고 건전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다 [온양신문사] 기자

이전 페이지로

 

 최근기사

 

220만 삶 ‘AI 대혁명’ 불지핀 ..  

‘충남 일자리 정책 이끈다’ 제4..  

충무교육원, 이순신 나라사랑 교..  

“글로벌 기업 투자, 3력·광속으..  

지역 국회의원과 ‘13.5조 확보’..  

민선9기 공약실천계획 도민과 함..  

아산시, 지역사회보장계획 평가 8..  

아산시, 도고면 기곡리 침수 대응..  

어르신 목욕·이용 편의 높인다…..  

도고면 행복키움추진단·파라다이..  

[시대진단] 다수결이면 다 정의로..  

충남교육청, 다문화 교육 연구학..  

충남교육청, 2026년 성과관리지원..  

“11월은 ‘정리정돈의 달’, 현..  

충청광역연합의회 제12회 정례회 ..  

아산시시설관리공단, 자원순환의 ..  

충남교육청 학생건강교육센터, 김..  

선문대 치위생학과, 한국치위생과..  

수피아사회적협동조합, 베이커리..  

‘그대! 80개의 나래를 펴라’  

회사소개 - 광고문의 - 제휴문의 - 구독신청 - 기사제보 - PDF 지면보기 - 개인정보취급방침 - 청소년보호정책 - 배너모음

 상호: (주)온양신문사 / 사업자등록번호: 312-81-25669 / 인터넷신문사업 등록번호: 충남, 아00095 / 제호: i온양신문 / 주소: 충남 아산시 남산로8번길 6 (온천동 266-51) / 발행인,편집인: 신민철
등록일 : 2010년 9월 24일 / mail: ionyang@daum.net / Tel: (041) 532-2580 / Fax : (041) 532-4580 / 청소년보호책임자 : 신민철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