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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통해 한국 깨우치려 노력 ·YMCA, 신민회 결성에 결정적 역할 ·음봉초에 선생 기념비 소재 윤웅렬의 맏아들 윤치호는 학문적 이상과 현실과의 괴리로 절망하던 18세기에 한국의 권력 핵심층의 부패 뿐 아니라 한국 사회의 여러 분야가 지도력의 실종을 경험하고 있다고 보고 이것에 대해 저항하려 했다. 그는 시대적 절망과 극복, 그리고 한국이 바뀔 것이라는 희망과 확신, 그리고 스스로는 물론 가문 전체를 깨우쳐 문중으로 하여금 개화기로부터 한국적 민주주의가 되는 과정 내내 한국사회 전체를 견인하도록 했던 것이다. 이는 부친 윤웅렬의 개화지향적인 성향이 장남 윤치호의 교육과 진로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그의 삶은 크게 기독교 입교 전과 후로 나뉜다
<기독교 입교 전> 1865년 윤웅렬의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아홉살 되던 해 서울 승동으로 이주했고 11살 되던 해에 안동의 김정언에 보내져 그곳에서 수학하다가 1881년 봄까지 어윤중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그는 부친의 뜻에 따라 과거시험을 통해 관리가 되려하지 않았다. 이는 부친의 개화지향적 성향이 장남인 윤치호의 교육과 진로에 직접적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17세 되던 1881년 조선정부가 일본에 보낸 조사시찰단에 어윤중의 수원(隨員)으로 참가해 4개월간 머물면서 명치 이후의 일본을 살폈다. 이후에도 윤치호는 귀국하지 않고 2년을 더 머물면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해 중등교육을 받았으며 이때 김옥균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고 귀국후에는 갑신개화파의 일원으로 함께 활동하게 된다. 청이 조선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반감을 품고 있던 윤치호는 일본식의 근대화 방안을 수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김옥균과 박영효 등의 개화파에 몸담았으나 때로는 그들을 향해 반대도 서슴치 않았다. 갑신정변 후 외무아문참의로 임명했으나 임금에게 반역할 수 없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즉, 전통권력에 대해서는 반대하고 저항하고 변혁을 꿈꾸었으나 충군(忠君)에 대한 책임의식 때문에 반대한 것이다. 그러나 갑신정변이 실패하자 그도 결국은 중국으로 망명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그는 기독교에 귀의하게 된다.
<기독교 입교 후> 중국 망명후 중서서원 입학 및 졸업을 통해 기독교에 입교한 윤치호는 1887년 감리교인으로서 세례를 받게 된다. 이후 기독교적 세계관과 그에 따른 새로운 윤리의식을 갖게 된다. 여기서 윤치호는 여타 유가 출신의 기독교인들이 유교와 기독교를 완전히 분리하지 않은 데 비해 철저한 단절,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과 전혀 다른 세계관으로 전환한다. 전통적 윤리관이나 신분의식이 없어진 것이다.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대학 입학한 후 서양문명과 민주주의를 직접 목도했고 거기서 한국이 기독교를 통해 새로운 가치관으로 바뀌도록 하는 사도와 같은 책임이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믿게되었다. 청일전쟁 뒤 10년만에 귀국후에는 기독교를 통한 구국활동을 펴고자 노력했다. 1896년 민병익을 수행해 러시아 황제(니콜라이 2세) 대관식에 참석하고 유렵과 미국을 도는 약 1년간의 세계일주 여행후에 그는 정부에 의지하기 보다는 기독교를 통해 한국을 깨우치는 사명을 다하고자 했다. 그의 기독교를 통한 구국의 신념은 1907년 을사조약 이후에도 변하지 않아 부친의 기부금과 자신의 기탁금으로 개성에 한영서원을 건립하고 교장이 되었다. 이후로도 아산 음봉의 보통학교, 송도고등보통학교, 이화여자전문학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등에 막대한 지원을 했고, 이외에도 수많은 학교, 교회, 병원 건축에도 많은 기부금을 희사했다. 또한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의 연구활동과 생활비 지원, 해외유학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모두 구국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기독교 교육이 갖고 있는 의미> 이와 같은 사상의 결집체로 1903년 창립된 YMCA와 을사늑약 후 만들어진 신민회 설립에 윤치호가 처음부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신민회의 별동대 격인 청년학우회를 만들어 전국에 확산시킨 후에는 일제에 의해 일명 ‘105인 사건’의 주모자로 엮여 수감되기도 했다. 3·1운동 후 이상재로부터 미국에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도록 권유받자 ‘미국에 가서 제2의 이승만이 되기 보다는 국내에서 교육을 돕는 것이 낫다’고 거절하고 교회를 통한 교회교육,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학교교육, YMCA를 통한 사회교육에 힘썼다. 때로 친일이라는 오해를 받는 윤치호는 그러나 일본 근대문명의 바탕인 일본의 황도정신을 선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이 정신에 구조적으로 저항하고 있는 기독교를 선택했다.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둔 신생국가를 염원했던 것이다. 윤리적 덕목만이 근대 산업사회의 공리적 사회규범, 시민계급을 만들어낸다고 보았고 서구의 국가들은 이것을 준수함으로써 산업문명을 창출하는 힘을 도출시켰으며 그런 사회는 부와 권력을 소유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임재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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