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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국보 제1호 숭례문(崇禮門)은 얼마전 악한(惡漢)의 방화로 소실됐다. 온 국민들은 경악과 분노(忿怒)를 금치 못하며 옛 그 모습 그대로의 그리움에 휩싸여 통곡까지 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숭례문’은 1396년(태조5년)에 창건하고 1448년(세종30년)에 개축했으며 예(禮)를 숭상한다는 뜻을 담아 숭례문(崇禮門)이라 했다. 1934년 일본이 ‘남대문’으로 지정했으나 1996년에 역사 바로 세우기 사업으로 ‘숭례문’으로 환원했다고 한다. 6백여년의 긴 역사를 지녔으며 참으로 보물중 보물이며 민족의 애환을 같이하면서도 특히 6·25의 민족상쟁의 험한 시기에도 남북간의 한결같은 민족공동성 이념(理念) 때문에 파괴되지 않고 원형그대로 보전된 ‘숭례문’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잔재의식을 지우지 못한 일부 인사들은 지금도 ‘남대문’이라고 호칭하고 있어 입맛이 씁쓸하다. 우리고장에 자리했던 온궁(溫宮)의 역사적 가치는 숭례문에 버금가는 보물이라고 하겠다. 규장각(奎章閣) 문서를 보면 일제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의도적으로 말살하기 위하여 ‘깡패’를 시켜 폭력으로 ‘온궁’을 강점하고 훼손하면서 신정관(神井館)이라고 하는 새로운 건물을 신축하고 온천장 또는 목욕탕 영업을 했던 것이다. 마치 명성황후(일명 민비) 시해사건과 같은식으로 온궁을 탈취한 것이다. 8·15해방 후 귀속재산 관리청에서 온궁자리를 일인(日人) 소유 경남철도주식회사 재산으로 간주하고 불하처분했다. 자산욕(資産慾)에 광분한 사람들이 불하받고 다시 전매하는 등 3~4차 환매 과정에서 남아있던 온궁 시설물이 하나, 둘씩 훼손되면서 사라지더니 지금은 아무 것도 남은 게 없다. 온궁은 태조대왕 이전부터 그 역사가 발현됐으며 역대 군왕과 대비들이 같이 머물렀던 기록들이 명확하게 밝혀지고 있다. 그야말로 6백년 이상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대왕’이 자기 아버지의 비운의 운명을 추모하여 세운 ‘영괴대’는 보는 사람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경기도와 수원시는 정조대왕의 유지에 따라 성곽과 누대를 다시 조성하고 역사를 빛내기 위하여 사적지 조성에 힘쓰고 있다. 그렇지만 그 가치성을 온궁 역사에 비교해 볼 때 온궁 역사를 추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고장 인사들이 ‘규장각’에 표시된 역사를 한번이라도 봤다면 장엄한 역사문화를 외면했을리 없었을 것이다. 이 고장 역대 시장·군수와 문화에 관계있는 기관장들이 ‘온궁’에 관한 관심이 있었다면, 귀속재산 관리청에 요청하여 ‘온궁’에 관한 관리 보존권을 우리에게 위탁해 달라고 했다면 그 요청을 외면하고 일반인에게 불하하지는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도 그러한 요청을 한 사실이 없으며 지금도 온궁에 관하여 무관심한 상태라고 하겠다. 숭례문 역사와 국보에 버금가는 온궁 역사를 헌신짝 버리듯 하지 말자. 세종대왕의 안질과 세조대왕의 피부병을 치료했다는 영천비와 세종대왕이 지어주신 ‘온양’이란 명칭은 온양시와 아산군이 통합과정에서 아산군의 인구가 온양시 인구보다 많다는 지역이기주의적 주장으로 인하여 역사성을 무시하고 온양 명칭을 배척하고 아산 명칭을 선호했기 때문에 자연히 온양의 명칭은 폐물 폐기하듯 버린 것이다. 지방의원들의 역사에 관한 지식이 부족한 탓이다. 또한 일제가 청일전쟁 때 아산에서 대첩했기 때문에 아산 명칭을 그들이 굳세게 고집한 이유가 있으며 일본인의 정신적 유지를 생각없이 우리가 승계 답습한 꼴이됐다. 생각할수록 부끄러운 점을 지울 수 없게 됐다. 온궁의 역사는 온양의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다. 고로 중앙의 요직에 있는 사람들이 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숭례문 역사에 버금가는 온양과 온궁의 역사문화가 우리고장사람들의 무관심으로 사라지고 몇줄의 글귀만이 남게 됐다. 난망의 복원이지만 그래도 자주 중앙에 품신한다면 역사문화를 무시하지 않은 중앙이라면 우리의 소원이 점진적으로 성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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