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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혁의 [행복한 아산 만들기]

2021년 08월 20일(금) 10:35 [온양신문]

 

여름 끝자락, 마당 넓은 집에서 맞는 한가로움

↑↑ ▲임윤혁(아산시 더큰시정위원회 위원)

ⓒ 온양신문

제아무리 온난화다 기상이변이다 설쳐대도 아직은 자연의 큰 흐름까지 바꿀 순 없는 노릇인가 보다. 낮 동안의 찌는 듯한 폭염과 밤사이에도 식지 않는 열대야로 한참 곤란을 겪게 하더니, 입추 말복 지나기 무섭게 아침저녁으로 바람 맛이 달라졌다. 끈적이지 않고 선선해서 한결 상쾌하다.

이즈음이면 울안 마당가론 연보랏빛 벌개미취 꽃잎 화사하게 피어나고, 줄지어 선 좀작살나무 열매도 진보라로 영롱하다. 한 갑자 남짓 버텨왔을 감나무는 선선한 바람에 떫은맛 덜어내고 대신 주황색 단맛을 끌어올린다.

뿐이랴. 울밖 싸리나무도 하나둘 떨어져가는 꽃 대신 꼬투리 가득 씨앗을 채워간다. 무심한 계절의 변화와 마당 구석구석 충일한 생명의 기운은, 소리 없이 다가오지만 자못 큰 울림으로 폭넓게 번져간다.

예전, 어릴 적 할머니 댁 앞마당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으려는 순응의 미학이 있었고, 합일과 조화라는 어우름의 가치도 존재했다. 말이 없어도 가족 간의 정을 확인할 수 있는 따뜻함과, 지친 심신을 위로하는 휴식이 있어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안온한 공간, 그곳이 바로 ‘마당’이었다.

그렇게 마당은, 집을 지으면 으레 따라붙게 마련인 부수적인 공간으로, 너무도 자연스러워 미처 그 존재를 자각하지 못하는 일상의 소소한 풍경으로, 그저 거기에 있을 따름이었다. 대청 아래 부복하고 있는 귀 닳은 섬돌이나 거칠게 마감한 흙담과 마찬가지로.

누가 어떻게 이용하는지에 따라 용도가 천차만별 달라지기도 하는 게 또 마당이었다.

아이들에겐 더없이 좋은 놀이터였다. 어린 남매는 이웃집 또래들까지 안마당으로 불러들여 소꿉장난이나 구슬치기로 해를 넘기기 일쑤였다. 계집아이들이 깨진 사기조각에 흙을 담고 꽃잎이나 나뭇가지 따위를 주워가며 상을 차려내면, 마당 구석에 엎드려 졸던 강아지도 꼬리 흔들며 끼워달라고 낑낑대기 마련이었다.

어머니들에게 마당은 또 다른 일터였다. 볕 잘 드는 한쪽 구석엔 장독대를 놓았고, 다른 쪽엔 물을 끌어들여 빨래며 설거지 같은 자잘한 부엌일도 처리했다. 마당 양끝을 이은 빨랫줄엔 옷가지들이 만국기처럼 펄럭였다.

가족이 모이면 서로의 마음 문을 여는 소통의 장이기도 했다. 네 방 내 방으로 구분된 한정된 공간에서는 할 말을 가려가며 조심에 조심을 더하던 시아버지와 며느리도, 마당에 펼쳐놓은 평상 위에서는 다소나마 허물을 털어내며 친근한 가족애를 나누었다. 젖은 솔가지에 봄내 캐어 말린 쑥 섞어 피워놓은 모깃불 옆에서 수박 나눠먹는 맛이라니….

그 마당이 특히나 그리운 시절이다. 곧고 높기만 한 공동주택에 갇혀(?) 살며 그동안 잊고 있던 정겨움과 여유와 편안함도 느끼고, 코로나19로 갑갑한 마음도 풀어놓을 요량으로 오랜만에 외암마을을 찾았다.

역시나, 건재고택이나 참판댁 안마당엔 무엇 하나 거스르지 않는 안온함과 시속의 다툼 따위 무시한 평화가 가득하다. 비록 아이들의 깔깔거림이나 그를 지켜보는 어른들의 따뜻한 눈빛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굳이 들어가지 않아도 그곳에서 뭔가를 느끼려 애쓰지 않아도, 우리를 푸근하게 감싸고도는 마당은 늘 거기에 있었다.

고택 마당을 기웃거리는 사이사이 이어진 고샅 풍경은 또 어떤가. 어른 기준으로 대여섯 걸음이면 맞닿을 돌담엔 누백 년 이어온 세월의 자취가 ‘허튼층’으로 켜켜이 쌓여 있고, 보일락 말락 야트막한 담장 안으론 배롱나무 진분홍 꽃들이 낯선 이를 반긴다. 그렇게 안마당은 담을 넘어 고샅을 지나며 이웃집 마당과 연결되곤 했었다.

아파트 천지인 지금이야 마당의 개념도 고샅이라는 의미도 모호해졌지만, 건재고택과 참판댁을 지나 송화댁까지 잇는 그 특별한 공간엔 이웃 간에 허물없이 나누던 정과, 꼭 지키던 최소한의 사람 사는 도리는 여전히 남아 있다. 경계는 있으나 내남을 가르지 않았고, 자연과 함께 사는 지혜가 넘쳐났다.

해가 나절가웃이나 기울고 멀찍이 다복솔 숲이 어둑해질 무렵이면 고샅 양쪽에선 밥 짓는 연기 한가롭게 피어오르고, “이제 그만 밥 먹으러 들어오라”는 소리가 담과 담 사이를 넘나든다. 아이 녀석들이 아쉬움 잔뜩 남기고 흩어질 무렵이면 ‘이내’ 밀려든 고샅엔 어느새 정적이 찾아들고, 창호지 너머로 새어나온 불빛은 달빛 머금어 은은하게 가라앉는다.

그러나, 그것은 잊기 싫은 지나간 세월의 편린일 뿐. 키 낮은 흙담 돌아들던 그 자리엔 평형대를 나누고 재물의 다소를 가르는 획일화된 잣대만 횡횡하다. 엎친 데 덮쳐 코로나19로 인해 이웃 간의 소통마저 부재하니, 더더욱 가족들이 모여앉아 정담을 나눌 수 있는 한가로운 마당과, 인정 넘쳐나던 고샅 풍경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요즈음이다.

온양신문사 기자  ion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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