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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鄕校)하면 전통적으로 유교(儒敎)를 신앙하는 사람 이외는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다. 특히 불교와 기독교 신자가 많아 요즘 불교와 기독교 세상이 된 현실에 젊은이들은 더욱 모르고 있다. ‘향교’는 조선조(朝鮮朝)시대 때에 시골에 있는 문묘(文廟)와 거기에 부속되어 있는 관립(官立) 학교이며 또한 교궁(校宮)이라고도 한다. 아산시에는 온양, 신창, 아산 세곳에 있다. 교궁(校宮)에는 성현(聖賢)의 위패(位牌)=(壇, 廟, 院 절에 모시는 신주(神主)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를 모시고 해마다 제사를 지낸다. 온양향교에서 모시는 위패의 배열은 중앙 제일 위쪽에 공자(大成至聖文宣王)를 모시고 바로 아래 우측에 안자와 공씨를, 좌측에 증자와 맹자 5위를 성인으로 모시고 바로 그 아래 우측에 빙월당 설총(氷月堂 薛聰), 회헌 안향(晦軒 安珦), 한훤당 김굉필(寒喧堂 金宏弼), 정암 조광조(靜庵 趙光祖), 퇴계 이황(退溪 李滉), 율곡 이이(栗谷 李珥),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신독제 김집(縝獨薺 金潗),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 백순 정호(伯淳 程顥) 10분이고, 좌측에는 고운 최치원(孤雲 崔致遠), 회암 주희(晦庵 朱憙), 보은 정몽주(甫隱 鄭夢周), 일두 정여창(一 鄭汝昌), 회제 이언적(晦薺 李彦迪), 하서 김린후(河西 金麟厚), 우계 성혼(牛溪 成渾), 중봉 조헌(重峰 趙憲),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남계 박세채(南溪 朴世采) 선생 등 모두 20인을 현인(賢人)으로 모신 뒤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낸다. 원래는 삼국시대부터 석전을 행했을 것으로 보며 신라의 경우 성덕왕 16년 당나라에서 공자와 10철(十哲) 72제자의 화상을 가져와 국학(國學)에 모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국학에서 석전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도 성균관에 문묘를 두어 제사를 지냈는데 왕이 직접 잔을 올렸다는 기록이 나타난다고 했다. 조선시대에는 건국이념이 유교인 만큼 처음부터 성균관에 문묘를 설치하고 중국의 현인과 우리나라의 18현인을 합한 112현인의 위패를 모신뒤 매년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냈으며 지방에서는 향교에서 석전을 주관했다. 1949년 전국 유림대회의 결의로 112현인 중 우리나라의 18현인만 대성전에 모시고 중국 94현인의 위패는 땅에 묻었다고 한다. 198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였다. 서원이나 향교는 유생들이 면학 하는 곳으로 일맥상통되는 점이 있다. 그러므로 지방에 따라 간혹 당해지방 출신인사 중 현인에 속한 분을 상호 추대하여 합의가 이루어지면 교궁(校宮)에 현인으로 모실 수 있다고 했다. 간혹 이를 반대하는 사람도 있으나 우리나라 사람으로 현인의 품격이 있는 옛 분을 추모하는 것은 큰 잘못이 없다 하겠다. 석가, 예수, 공자, 맹자가 다 성인이며 근세사에 있어 유교, 불교, 예수교가 수천년에 운이 다 했다고들 한다. 성인의 가르침을 제대로 세인이 따르지 않기 때문에 그러하다는 것이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선성지소교(先聖之所敎)요 수심정기(守心正氣)는 유아지갱정(唯我之更定)이라고 주장하신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선생을 우리나라의 성인으로 받들고 있다. 즉 「‘인의예지신’은 먼저 성인이 가르친 바요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은 오직 내가 다시 정한다」라고 하신 것이다. 인의예지신은 사람마다 삼척동자도 알고 있지만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이것을 실천하자면 자기마음을 자기가 지키고 자기 기운을 자기가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다. 공부자의 어진도덕은 전천추(前千秋) 후천추(後千秋)를 일관(一貫)하여 전(傳)했다고 하지만 불과 72인만 도통하고 말았다고 하니... 선비문화는 점점 사라지고 시중잡배의 속성이 활개를 치고 있으며 정치인들은 진정한 민생문제는 외면하고 성군취당(成群聚黨) 극성중(極盛中)에 허송세월하고 이전투구하고 있으니 이것 또한 시운(時運)인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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