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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윤혁의 [행복한 아산만들기]

2020년 09월 18일(금) 10:27 [(주)온양신문사]

 

한가위 단상, 다시 찾고 싶은 인정과 여유와 감사

↑↑ ▲임윤혁(자유기고가, 아산시 더큰시정위원회 위원)

ⓒ 온양신문

신새벽. 박명의 잔재는 여전히 푸르스름하기만 한데, 그 시린 기운 사이로 커다란 함지를 머리에 인 아낙들의 잰걸음이 이어진다. 이제 코앞으로 닥친 한가위 명절 준비를 위해 떡살들을 이고 지고 동네 어귀 방앗간으로 향하는 발걸음들이다.

지난밤부터 ‘떡 타령’에 몸살을 앓던 아이들은 아직 잠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고, 바지런한 삽살개 두엇만 고샅을 따라 돌다가 집주인의 호통에 꼬리를 말곤 주저주저 뒷걸음질을 쳐댄다.

그맘때, 마을 앞 너른 들녘으론 ‘지지배배’ 낱알을 노리는 참새며 멧종다리들의 날갯짓이 유난히 부산스럽기 마련이다.

▲소통과 나눔의 중심, ‘방앗간’
오랜 세월 농경문화를 지켜온 우리 민족에게 있어 한가위는 연중 가장 큰 명절이었다. 씨 뿌리고 땀 흘려 가꾼 수확물을 거두는 일은 그 자체가 최고의 성취이고 삶의 목적이며 생존의 요긴한 수단이었다. 자연히 한가위 즈음에는 빈부와 귀천을 가리지 않고 온 백성이 넘치는 풍요와 넉넉함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 중심에 방앗간이 있었다.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맛깔스럽고 풍성한 먹거리를 모든 행사와 각종 의례의 머리에 두어왔다. 그러다보니 각종 음식의 원재료를 일차 가공하는 방앗간은 여염집 아낙이라면 일 년 내내 문턱이 닳도록 넘나들어야 하는 요긴한 공간이었다.

그런 아낙들이 한 동네에 수십이니 자연히 방앗간 ‘피대’도 좀체 멈춰 설 줄 몰랐다. 오늘은 아랫말 김샌네 조부 기일이고, 내일은 윗말 새터댁네 손자 돌잔치고, 돌아오는 ‘공일’은 건넛말 영식이네 둘째딸 혼례일이고…, 방앗간 기계에서는 시루떡이며 인절미에 절편까지, 온갖 떡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오는 게 어디 떡이나 쌀 뿐이던가. 한가위나 설 같은 명절 밑에는 떡쌀을 빻거나 떡을 뽑으려고 모여든 동네 아낙들이 커다란 함지박들을 길게 잇대어 놓곤, 한동안 나누지 못했던 저간의 사정들을 주고받느라 여념이 없었다.

거개가 ‘아무개 댁’ 같은 택호로 불리며 서로가 “형님, 아우님” 하는 사이들인 이들은 연중 몇 번 안 되는 그 호기(?)를 놓치지 않고 마음속에 맺히고 꼬였던 감정의 편린들부터, 살아가면서 반드시 숙지해야 할 생활의 지혜까지를 풀어내고 주고받았던 것이다.

입을 가리고 더러는 땅을 쳐가며 웃고 떠드는 그 수다에는 자식자랑부터, 시댁 험담, 심지어는 부부간의 내밀한 속사정까지가 낱낱이 까발려지기 일쑤였다.

그렇듯, 방앗간 안팎은 평소 잘 듣지 못하던 수많은 소리들이 넘쳐나는 ‘수다’의 장이며 의외의 재미와 짜릿한 일탈의 기쁨이 넘쳐나는 여인들의 해방구였다. 누가 오지 말라고 억지한 것도 아닌데, 아낙들의 드센 입심을 견딜 재간이 없는 남정네들은 대개 무거운 함지박만 들어다놓곤 슬그머니 꼬리를 감추곤 했었다.

▲함지박 가득 담아가던 ‘여유와 인정’
그렇게 수다도 떨고 ‘호호깔깔’ 마음껏 웃어대며 기다리다 곱게 빤 떡쌀을 이고 가는 아낙의 입가엔 보일듯 말듯 미소가 물려 있기 십상이었다. 그네의 미소 속에는 풍성한 수확에 대한 뿌듯함과 함께, 그동안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가슴 졸이던 답답증을 속 시원히 털어버린 후련함도 함께 배어 있었다.

그렇듯, 방앗간은 아무리 퍼 써도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은 인정과 여유와 활력을 간직한 우리네 삶의 풍요로운 곳간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방앗간도, 정겨운 풍경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여전히 한가위 차례상에는 송편들이 올라가지만, 더 이상 햅쌀을 골라 빻지도, 밤새워 이야기꽃을 피워가며 송편을 빚지도, 뒷산에 올라 깨끗하고 온전한 솔잎을 따오지도 않게 된 풍습이 우리 곁에서 넘치는 인정마저 빼앗아 간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하수상한 세월은 심상찮은 역병(코로나19)을 천지사방에 풀어놓아, 아예 한가위 명절마저 앗아갈 기세다.

시속이 이러하니 방앗간이라고 견딜까. 아산에도 방앗간 이름을 내건 곳이라곤 스물 남짓이 고작이다. 그나마도 방앗간 속속들이 배어 있던 훈훈한 인정과 기다릴 줄 아는 여유, 자연에 대한 감사, 이웃을 생각하는 따뜻함마저 찾아보기 힘드니,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온양신문사 기자  ionya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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