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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온천초 앞을 지나서 온궁로와 온양대로를 관통해 용화동까지 이어지는 2차선 도로. 이 길은 용화고등학교 앞까지 이어지고 있는데 이 일대가 바로 과거 너더리의 마을 안쪽동네였다. 맨우측 아파트가 용화동 온천마을아파트이고 그 옆이 용화고등학교다. |
‘상전벽해’마을옛정취사라진 너더리 황토밭·미류나무길 사라지고 복잡한 주택가 골목길로 변화
창간18주년 특집 온양이 바뀐다 ⑦ 너더리
너더리는 현재의 용화동 동쪽에 있는 마을로 과거 온양군 이북면(二北)면 ‘판교리(板橋里)’라 칭했던 마을이다.
이는 마을 앞 개울에 널판대기를 놓은 다리가 있었으므로 ‘널다리’라 부르다가 ‘너더리’로 변하였다고 하며 과거 이곳에서는 군마(軍馬)를 사육했다고도 한다. 너더리는 현재의 용화고등학교 맞은편 일대라고 보면 대략 맞는다. 과거 한국전력 앞에서 철도건널목을 건너 우측으로 꺾어지면 창고말, 그대로 앞으로 주욱 나아가면 나오는 곳을 너더리로 총칭했다.
너더리 지명 새로운 주소체계에서도 살아남아
현재는 새로운 주소체계로 길 이름을 바꿔붙였는데 이 일대는 전부 ‘너더리○길 ○○호’식이다. 다시말해 너더리는 현재 길이름에 ‘너더리’가 붙은 동리 전체를 말하는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 하겠다.
너더리는 특히 온천리 문화촌을 지나 펼쳐진 논배미 방죽길로 창고말과 연결되었는데 해마다 가을이면 논에는 누렇게 익은 벼이삭들이 황금물결을 이루었고, 또 과수원에는 사과와 배, 대추들이 울긋불긋 무르익어 바라만 봐도 배가 불렀다.
또 너더리 안쪽으로 이어지는 미루나무길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어르신들의 아련한 뒷모습이 눈에 삼삼하다.
| | | ▲ 과거 너더리의 마을 중심이던 용화고 앞 일대. 플랭카드는 주택지 개발 정비구역 지정을 바라는 주민들의 요구가 도에까지 올라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활량한 잡초밭 위에 세워진 타워형 아파트군(群)과 널다리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용화 4/5통 경로당 일대. | 창고말과 대립하던 아이들
또 70년대 이전만 해도 양 지역 아이들은 무슨 이유 때문인지 자기 마을에 건너편 마을 아이들이 지나가면 길을 막고 심하게 놀리는 일이 많았다. 놀림이 지나쳐 동네싸움으로 번지는 일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물론 오래 갈 싸움은 아니었다.
창고말의 구모씨(47세)는 “아이들은 대개 너더리 언덕 위 못줄공장 주변이나 너더리와 창고말을 잇는 논에서 가끔 맞부딪쳤다. 말싸움으로 시작해서 때로는 돌팔매를 하는 등 위험하게 싸우기도 했다.
현재 지역에서 모 민간단체장을 맡아 유지라 있는 H도 장난이 심한 친구였는데 자기네 집 마당으로 건너편 동네아이들이 지나가면 심하게 놀리는 것으로 유명했다”며 웃는다.
너더리도 창고말과 마찬가지로 마을의 반이상이 잡초밭과 과수원지대였다. 지금의 현대아파트 일대는 잡초밭과 포도과수원, 용화고 일대는 배과수원이 대부분을 차지했었다.
이런 가운데 현대아파트 일대는 또 커다란 묘지와 정려, 비(碑)를 중심으로 넓직한 잔디밭이 펼쳐져 있어 시야가 확 트인 곳으로도 유명했다. 또 언덕 위에는 못줄공장이 있어 농한기 인근 지역 아낙네들의 소일거리 겸 용돈벌이로 한몫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황량하던 황토밭 주택가로
못줄공장에서 너더리길 방향의 비탈밭 일대는 70년대만 해도 뻘건 황토흙을 드러내놓은 천둥벌거숭이 동네였다.
그러나 80~ 90년대 들어 개발 붐에 편승해 현재의 주택지를 이루었다. 현재의 주택지로는 전혀 옛날의 모습을 유추할 수 없다는 것이 출향후 20여년만에 귀향했다는 하모씨(45세)의 말이다.
널다리가 있었다는 곳은 마을 안쪽 지금의 용화동(4·5통) 경로당 근처로 추정된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이곳을 지나는 개울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 크진 않았고, 널다리 대신 시멘트 다리가 있었다.
이 개울은 철도 건널목앞에서 풍기동 방향에서 흘러오는 실개천과 만나 창고말 언덕 아래를 흐르며 온천천의 상류 구실을 했다.
현재 너더리에서 나오던 실개천은 그나마 복개되어 자취를 찾을 수도 없다.
<임재룡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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