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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훈련받고 양구 전투에 투입 ·전사하거나 부상 당해야 제대 지난 4월1일자로 무공수훈자회 아산지회장을 맡은 김준희(1952년) 회장은 51년 5월 7사단 8연대 소속으로 양구전투에 참가하여 52년에 ‘화랑’ 무공훈장을 받았다. 무공훈장은 상훈 법 제13조에 규정되어 있는 훈장의 한 종류로 전시 또는 이에 준하는 비상사태 하에서 전투에 참가해 뚜렷한 무공을 세운 자에게 수여하며, 태극, 을지, 충무, 화랑, 인헌의 5등급으로 돼 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김 회장의 회고담을 들었다. 5일 교육 받고 전투 투입 그때 당시는 병력이 모자랐기때문에 대전에서 겨우 5일간의 군사교육을 받고 무장해서 전방으로 가게됐다. 거기서도 겨우 보름 정도 훈련받고서 총 들고 바로 현장에 투입됐다고 한다. “처음 양구에 도착한 날이 생각난다. 밤에 이동해 양구에 도착해 보니 한마디로 쑥대밭이었다. 전시상황에 어느 곳이 그렇듯 처참했었다. 도착한 날 밤 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는 밤새 비를 맞으며 연대천막을 쳤다. 그렇게 양구에서의 내 군 생활이 시작됐다.”며 김준희 회장은 지그시 그 때 당시의 장면을 회상했다.
썩은 고기 먹고 난 배탈, 그건 병도 아니다 식량 보급하던 곳이 포 사격을 받아 며칠을 굶은 적도 있었고, 눈이 일찍 온 추운 겨울에는 견딜 수 없는 추위를 이겨내려 산을 한바퀴씩 돌기도 했으며, 더운 여름에 어쩌다 나온 돼지고기는 더운 기온 때문에 변질 돼 먹고 배탈 나서 고생한 적도 있지만 전시 상황이기에 부상자가 아니면 그깟 배탈쯤은 그냥 혼자 앓아 넘기는 것이 전부였던 상황 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황 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부상자나 전사자 처리를 할 때였다고 한다. “낮에는 차가 발각되기 쉽고 또 발각되면 바로 포사격을 받기 때문에 도로에 차가 다니지 못했다. 때문에 부상자를 구급차로 실어 이송해야 했지만 밤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 동안 임시치료와 지혈을 하며 버텨야 하는데 그 사이에 죽어나가는 사람도 참 많았다. 그때는 군대에 들어왔으면 전사하거나 부상을 당해야지만 나갈 수 있는 그런 상황이었다.” 그렇게 고통을 함께 했던 전우들이 하나 둘 곁을 떠났다며 그 당시 상황을 들려줬다. 휴전 일주일 전쯤에 식품과 장비를 보급해 주던 사람들이 가져온 신문을 보고 휴전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김준희 회장은 “아! 이제 남은 일주일만 살아남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버텼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일주일 동안에도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갔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일 밤 낮 포선 소리로 시끄럽던 하늘이 조용해졌다. 그날은 53년 7월 27일. 휴전인 것이다.
전쟁 후유증 - 종교로 극복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극한 긴장감 속에 있다가 휴전이 되고 집으로 돌아오자 긴장감이 풀려서 그랬던지 몇 년을 중병으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휴전 후였어도 상당히 어려웠고 가난했기에 아프다고 병원을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러다 보니 병을 앓아도 전문적 치료 같은 건 받을 엄두고 못 내고 혼자 앓아냈다. 그 당시에는 그렇게 죽어간 사람도 많았다. 전쟁은 승자 패자 모두 죽는 것이다. 절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제대 후 그렇게 병으로 고생하다가 아내의 권유로 신앙생활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안정을 조금씩 찾으며 술도 담배도 끊게 됐다고 한다.
태극기 보급, 사진전시 김준희 회장은 해 마다 100여개의 태극기를 역전과 실내수영장 앞에서 나눠주고 있는 일을 3년째 하고 있다. “태극기 게양 안하는 것이 참 애석하다. 나라를 생각하는 국가관. 나 보다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나라가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다.”라며 그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의 중요성을 몇 번이고 다시 말했다. 그리고 이어 “현재 북한의 많은 도발이 일어나는 상황에서는 투철한 안보정신과 애국관이 더욱 절실히 요구 된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태극기 보급하는 일 외에는 아파트 경비실에 가서 태극기를 게양하게 방송 요청 하는 것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이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이번 역전에서 열린 사진전이었던 것이다. 전쟁의 심각성을 깨우쳐 줄 일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다가 생각해 낸 전시회로 이런 전시회를 통해 전쟁이 남긴 참혹함과 고통을 일깨워 주려는 의도에서 열리게 됐다고 한다.
형편 어려운 회원 일자리 있었으면 회원 중 형편이 어려운 분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할 방법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이가 많아서 제약이 되지만 그래도 하고자 하는 분들이 있다. 일거리나 봉사 활동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라고 말한다. 나라에 필요한 사람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할일이 별로 없다며 85살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을 찾고 있다. <이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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